매일신문

영화간판 그려온 강육칠씨

"25년동안 평생의 업이라 생각하며 극장간판을 그렸지요. 지금도 영화포스터 보면 근질근질해요".

열네 살때부터 대구 극장가에서 영화간판을 그려온 강육칠(50.동구 신암동)씨. 아버지를 따라 영화보러 다니다 순전히 '영화가 좋아' 이 길로 접어들었다. 극장들의 호시절과 함께한 '화려한 시절'이었다.

"월급도 없이 맞아가면서 배웠어요".

페인트가 아니라 수성물감, 아교등을 물에 섞은 '안료'를 재료로 커다란 종이에다 그림을 그려 간판에 바르던 당시. 대한극장에서 청소하며 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당시 코리아극장에서 그림을 그리던 평생의 스승 홍가휘씨를 만난다.

"그때는 대구에서 그림을 옳게 그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선생님은 대구에서 '맞데생'을 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어요". 원본사진에 촘촘한 칸을 그어 간판에다 확대하는 '고방데생'이 일반적이었지만, 그의 스승 홍씨는 원본을 보면서 바로 간판에다 옮겨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극장구경이 최고의 오락이던 70, 80년대, 강씨는 '화수, 목금, 토일월(2.2.3)'로 영화가 교체돼 여덟 곳 극장에서 그림을 그린적도 있었다. 새 영화가 오는 전날에는 전 극장 직원이 나와 밧줄을 걸어 간판을 교체하느라 씨름하던 때였다.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설과 추석, 극장대목때면 평소 두배 크기의 '특별간판'을 그리기 위해 날밤을 새기도 했고, 일이 많을 때는 배우 얼굴에 두건을 덧칠하거나, 손을 지우고 칼을 들게하는 식으로 간판을 슬쩍 '재활용'하는 일도 있었다.

80년대 초 영화 '유학생' 간판을 그릴 때 실수로 박노식의 콧수염을 신성일 얼굴에 그린 일, 중국배우 '왕우'의 손가락을 여섯개로 잘못 그렸다 십년감수했던 일, 실력있다는 선배들의 극장간판을 눈구경하며 돌아다닌 일도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유명해지기 전의 고 이주일 얼굴을 그려준 일도 있다. "77년쯤 신도극장에서 하춘화 쇼가 열린 때였어요. 볼품없게 생긴 남자가 작업실로 불쑥 들어와 '내일 쇼 사회를 보는데 내 얼굴을 좀 그려달라'며 천원짜리 스무장을 주는 거예요. 그 사람이 바로 이주일이었어요".

그러나 90년대초 만경관에서 대구 최초로 '실사영화간판'을 내건 이후, 중앙시네마를 위시한 멀티플렉스가 연이어 들어서면서 강씨같은 '그림장이'들은 무성영화시대 '변사'처럼 사라졌다.

이들은 한때 대구에만 30여명이 넘었지만, 현재는 제일극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 명만 남았다고 한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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