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업을 하고 있는 신원용(55)씨는 가게에서 세탁물을 다림질을 하는 동안 늘 음악과 함께 한다.
오전 7시40분부터 밤 9시까지 늘 고단한 하루의 연속이지만 그나마 음악은 그에게 좋은 벗이다. 극장용 오디오시스템을 직접 개조한 스피커에서는 가게를 우르릉 와르릉 울릴 정도의 웅장한 소리가 쏟아져 나와 귓전을 때리고, 감미로운 올드 팝송과 가요, 클래식 음의 선율은 밀려드는 일감에 지친 그를 달래준다.
세탁일을 한 지도 벌써 20년이 가깝지만 그의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피붙이나 다름없는 올드 기기들 틈에서 부지런히 다리미를 움직이는 그의 표정에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한 행복감이 흐른다.
대구시 중구 수동 종로클리닝. 30평 남짓한 신씨의 일터는 세탁물과 오래된 오디오 기기, 부품이 뒤섞여 세탁소인지 스튜디오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다. 30년동안 수집해온 올드 오디오 기기와 부품들이 가게 구석구석에 숨어 얼굴을 감추고 있어 마치 별천지나 다름없다.
다림질 후 걸어 놓은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밀치면 각종 기기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고가의 하이엔드(High-end) 제품처럼 진한 광택은 나지는 않지만 신씨의 손때가 묻은 낡은 오디오 기기에는 명품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더러 흠도 있고 먼지가 살짝 앉아있지만 제니스 진공관라디오와 JBL 파라곤 스피커, 쿼드 진공관 앰프, 독일제 그룬디히 장(長)전축 등은 그 무엇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애장품들이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하나씩 수집한 기기들이라 신씨에게는 자식과도 같다.
1960, 70년대 감수성 예민한 학창시절 당시 라디오나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나 팝송 듣기를 그는 무척 좋아했다. 우연한 기회에 잠시 오디오 전문점에서 일한 것이 계기가 돼 올드 오디오 기기에 푹 빠졌다. 시간 날 때마다 서울 세운상가, 대구 교동시장 등지를 찾아다니거나 책을 통해 오디오에 관한 전문지식을 배워 나갔다.
혹여 마음에 드는 기기나 부품들이 눈에 띄면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손에 넣어야 했다. 중학교 다닐 무렵 일본에서 세탁기술을 배워와 가게를 낸 고모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평생 직업이 된 세탁 일.
이 일로 버는 수입으로는 세 식구 생활도 빠듯한 형편이지만 그는 자신의 유일한 취미생활에 아낌없이 지출했다. 30년 가까이 수집한 기기들을 모으면 1t 트럭 2대분은 족히 될 정도. 이 때문에 종종 아내로부터 볼멘 소리도 듣지만 이리저리 달래며 그럭저럭 잘 넘기고 있다고 신씨는 말한다.
하지만 오디오를 취미로 한 그에게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절대 많은 돈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고가의 제품에 관심이 있겠지만 신씨는 직접 발품을 팔아 대개 수십만원이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기기들만 수집해왔다.
돈이 아니라 얼마만큼 오디오 기기들을 아끼고 교감하느냐는 것이 그의 관심사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기기들을 애지중지 다루며 늘 곁에 두었다. 계절변화로 일감이 많은 요즘이면 신씨의 마음에 쏙 드는 음악을 선사하는 오디오 기기들 때문에 더욱 힘이 난다. FM 전파를 탄 클래식 음악도 그에게 좋은 친구다. 신씨는 FM 방송프로그램을 시간대별로 줄줄 꿸 정도. 일하면서 늘 음악을 듣는 탓에 몇 시에 어떤 음악이 방송되는지 훤하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신씨는 소리에도 관심이 많다. 각종 오디오 부품들을 구해 직접 자작하거나 개조하기도 한다. 보다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스피커에 별도로 제작한 혼(horn)을 달아내는 기기실험도 한두번이 아니다. 때로 오리지널 음향보다 더 부드러운 소리를 내도록 혼 속에 나무막대 등을 집어 넣어 변화를 시도하는 등 소리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남다르다.
요즘 신씨는 자주 만나는 지인들과 함께 음악도 듣고, 정보를 나누는 오디오동호회 결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꿈은 오랜 세월동안 수집해온 기기와 부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오디오 자료관 건립이다.
고향 경남 밀양에 있는 400평의 땅에 큰 돈 들이지 않고 자료관을 지어 관심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와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그는 늘 마음속에 갖고 있다. 대학다니는 외동아들이 독립할 쯤이면 그 꿈이 실현되지 않겠느냐며 소박한 꿈을 털어 놓았다.
'칙- 칙-' 증기를 내뿜으며 말끔히 주름을 펴는 다리미 소리와 틀질 소리,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정겨운 음악이 함께 어울리는 세탁소. 갖가지 사연들을 가슴에 묻고 소리에 삶을 실어가는 주인 신씨의 좁은 세탁소에선 잔잔한 '행복'을 담은 소리의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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