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파일 이곳'-겨울 문턱서 엿본 서민 표정

지난 주부터 수은주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대구기상대에 따르면 29일 대구의 낮 기온이 예년에 비해 6도나 낮았고, 27일 관측된 팔공산의 첫 관설(觀雪)도 한달 이상 빠르다. 다음 주도 찬 고기압의 영향으로 차가운 날씨가 계속되고, 11월까지 평년보다 낮은 기온이 계속 될 것이라는게 기상대의 예보다.

가을인가 싶더니만 벌써 겨울 초입. 일주일이 채 남지 않은 입시에 수험생들은 초조함이 더해가고, 서민들에겐 월동 걱정이 앞선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노동자들은 하루 일거리에 고단한 삶을 걸어놓고 있고, 퇴근길 포장마차에서 삼삼오오 소줏잔을 기울이는 월급쟁이들은 치솟는 물가와 얄팍한 지갑에 어깨마저 무겁다. 겨울을 앞둔 서민들의 생활현장. 2002년 대구 겨울의 풍경은 그다지 밝아 보이거나 따뜻해 보이지 않는다.

◈새벽, 인력시장

아직 세상이 짙은 어둠 속에 잠자고 있는 새벽 5시 40분. 북비산 네거리에 40, 50대로 보이는 30여명의 사람들이 길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시내 이곳저곳으로 '품'을 팔기 위해 기다리는 인력시장 사람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두꺼운 옷차림들이다. 모닥불가에서 추위를 녹이며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로 무료한 기다림을 달랜다. 건설 공사장에서 단순 잡역 등으로 막품을 팔려고 나선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는 곳이다.

북구 침산동에 사는 김성수(가명·45)씨는 "조그만 가게를 하다 그만두고 별로 가진 기술도 없어 이 곳에 나온다"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벌써 추위가 닥치니 걱정"이라고 긴 한숨을 내쉰다. 그러는 사이 일감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여전히 기다림은 이어진다.

뚝 떨어진 기온에 날씨 이야기가 오간다. 곧 있을 선거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내달부터 오른다는 가스값이며, 올해도 어김없이 시험을 코 앞에 두고 날씨가 추워 걱정이라는 등 이런저런 대화가 토막토막 이어진다.

시중에서는 가계소비가 늘어 걱정이라느니, IMF의 긴 터널에서 거의 빠졌나왔다고들 하지만 이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여전하다. 심상찮은 경기전망에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들면 일감은 뚝 떨어질 것이고, 이들 일용직 근로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생계마저 큰 짐이 될터다.

오전 6시30분. 하늘이 뿌옇게 열리고, 동 틀 시간도 멀지 않았다. 인력시장에 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일감이 있는지 찾아 나선다. 가방을 들쳐매고 길을 나서보지만 빈 손에다 차가워진 날씨마저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어 이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만 간다.

◈오후, 반야월 저탄장

동구 반야월 저탄장(대구 연료공업단지). 지난 1971년 들어선 이래 오랫동안 서민들의 안방을 따뜻하게 덥혀주던 곳이다. 10여년 전만해도 하루 수백대의 연탄 배달차량이 드나들면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기름과 도시가스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사양길에 접어든지 오래다.

70년대 후반 소위 주유종탄(主油從炭) 에너지 정책으로 우리 생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연탄이지만 영세민들에게는 한장에 300원하는 연탄이 이번 겨울을 지켜주는 유일한 난방이다.

그 많던 연탄공장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 바람에 이제 남은 공장은 겨우 3곳. 하지만 아직도 검은 탄가루 빛이 동네 곳곳에 배어있다. 서민들을 상대하는 주변 연탄판매소들도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30년째 이곳 저탄장 주변 율하동에서 연탄 배달을 해온 대영연탄판매소 문만승씨는 한창때보다 연탄소비량이 100분의 1로 줄었다고 말했다. 월 평균 500장 팔기도 힘들다는 문씨는 그나마 10, 11월이 전부라며 "경제사정이 더 나빠지면 수요가 늘지 모르지…"라며 일말의 기대를 갖기도 했다.

최근 몇년동안 서민들의 살림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연탄을 때는 가정도 늘어난 것은 바로 IMF가 가져온 한 풍경이다. 남산종합사회복지관 윤보경부장(사회복지사)은 "매년 11월이면 국민기초생활보장 대상자나 영세민들에게 김장을 담궈 보내거나 성금을 모금, 난방비를 지원하고 있으나 넉넉치 않은 수준"이라며 해마다 이맘 때면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밤, 북성로 포장마차

밤 11시. 북성로 공구골목 한켠에 자리잡은 돼지불고기 포장마차. '오뚜기' '달맞이' '방앗간' 등 정겨운 이름을 내건 포장마차에서 매캐한 연탄불에 고기 굽는 냄새가 거리를 휩쓴다.

늦은 귀가길에 잠시 들러 소줏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둥근 탁자에 둘러 앉았다. 더러 중년부부와 딸인듯 보이는 세 가족도 고기 한 접시와 따끈한 우동을 앞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3년째 여기서 장사를 했다는 '달맞이' 포장마차 주인은 요즘 통 손님이 없다고 푸념한다. 포장마차하면 겨울을 떠올리지만 이제는 옛날 이야기란다. 여름철이 최성수기고 겨울은 그 다음이라고. 도합 1년에 8개월 장사다.

많을 때는 하루 150만원까지 매상이 오를 때도 있지만 늘 그렇게 된다면야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택시 운전기사들이 즐겨 찾는 이 골목은 돼지불고기로 유명한 곳. 불야성을 이루는 칠성시장 포장마차 골목과는 풍경부터 다르다.

촉 낮은 전구밑에서 달끈한 고기 한 점과 소주 한 잔을 곁들이는 서민들의 겨울삽화는 포장마차를 걷는 새벽 5시까지 이어진다. 내일이면 11월. 겨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풍경은 도시가스 배관공사로 온통 도로를 뒤집어 놓아 거리를 어지럽히는 먼지만큼 쓸쓸하기만 하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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