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 앞으로 다가온 제 16대 대통령선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선거전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대선은 국민들 사이에 최대의 화제, 최고의 '안주거리'가 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잣대가 필요하겠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 대선전은 5년전과 10년전에 치러진 14대와 15대 대선과 너무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어 시계바늘을 되돌려보는 것도 주요한 관전법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제 14대 대통령선거(1992년12월18일)
92년 한 해는 선거로 시작했다가 선거로 막을 내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국민당의 창당으로 연초부터 민자, 민주 양당에다 국민당까지 합세한 3각 구도의 대선 기류가 불붙기 시작했다. 또 대선의 전초전이 된 3월 총선은 온 나라 전체를 대선 분위기에 젖어들게 했다. 5월에는 민자, 민주 양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열려 본격적인 대선 정국을 형성했다.
8월 들어 노태우 대통령은 민자당 총재직을 김영삼 후보에게 넘겨줬고 이어 9월에는 중립내각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0월에는 민정계인 박태준 최고위원과 박철언 의원 등 중진들이 YS에게 반기를 들고 탈당했고 이들 가운데 다수는 대선이 임박해서 정주영씨의 국민당에 몸을 맡기는 신세가 됐다. 11월에는 노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 의원이 민자당을 탈당, 국민당으로 이적, 파문이 일기도 했다.
14대 대선기간 동안 대구·경북에서 가장 잘 먹혀 들어간 구호는 민자당의 '우리가 남이가'였다. 민자당은 또한 영남 표를 위협적으로 잠식해 들어온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를 견제하기 위해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구호로 영남 표의 결집을 꾀했다. 결국 압도적인 표 차이로 김영삼 후보는 승리했다. 선거 초반 다소 혼미해 보이던 대선 판세를 결국 지역감정이 가른 것이다.
연초 창당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통일국민당은 1년 내내 현대그룹 지원설을 몰고 다녀 주목을 끌었다. 급기야 12월5일 현대중공업의 비자금 조성과 관련한 폭로가 터져나와 국민당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대선후보와 언론의 날카로운 대립도 14대 대선에서 크게 불거졌다. 국민당은 편파보도를 이유로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벌였다.
특히 12월11일 발생한 부산 초원복집 사건은 14대 대선의 최대 하일라이트였다. 국민당은 이를 15일 전격 공개했다. 이 사건은 부산지역 기관장의 민자당 선거지원과 지역감정 자극 발언들이 국민당 관계자들에게 도청돼 내용이 전해진 것이다.국민당은 이 사건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했지만 오히려 영남의 유권자들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우려한 듯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몰표를 주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영남권의 반DJ 정서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입증하는 결과만 낳았다.
▨제 15대 대통령선거(1997년12월18일)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대선 4수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양강 구도에다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한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가세한 3강 구도로 전개됐다. 다른 대선처럼 군소 후보들은 많았으나 이들 3인의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며 대선판도를 개표 시점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
15대 대선은 또한 집권당 후보가 개인적인 문제와 당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야당 후보에게 지고마는 첫 번째 선례를 남긴 선거였다. 물론 IMF 경제위기라는 특수 상황도 여권을 궁지로 몰아넣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여당후보라고 해도 관권·금권 선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단합된 힘을 보이지 않고서는 이기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지역감정의 망령은 97년에도 위력을 톡톡히 발휘했다. 영남은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고 호남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며 거의 싹쓸이에 가까운 표를 김대중 후보에게 몰아주었다. 또한 호남의 철옹성같은 DJ 지지에 맞서 신한국당은 영남정서를 자극하기 위해 5년전에 썼던 전략을 다시 꺼집어 냈다.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것이었다.
연초부터 9룡으로 불리며 경쟁구도를 형성한 신한국당의 대선 예비후보 9명은 7월 경선 때까지 갈등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불거진 경선 불공정 시비는 결국 신한국당을 분당 일보 직전까지 몰고가는 원인이 됐다.
특히 경선 직후 과반수를 넘었던 이 후보에 대한 지지가 두 아들의 병역문제로 급전직하하자 당내 이회창 민주계가 중심이 된 반대파들은 후보 교체를 들고 나왔다.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 후보들과 이들은 결국 대선에서 이 후보를 위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신한국당 경선에서 2등을 한 이인제 전 경기지사도 결국 탈당과 국민신당을 창당, 대선 후보 대열에 합류했다. 한 때 이 전 지사는 지지율에서 이회창 후보를 압도, 신한국당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 지사는 초반의 돌풍을 이어가지 못했다. 여기에는 일부 언론이 이 전 지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나선 것도 원인이 됐다. 11월초 터져 나온 YS의 200억원 지원설도 기폭제가 됐다. 이 논란을 둘러싸고 국민신당의 대 언론투쟁이 시작됐다. 92년 국민당과 조선일보와의 격돌이 5년이 지나서는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과 조선·중앙일보의 충돌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는 자민련 김종필 후보와 DJP 연대 성사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결국 7월에서 10월에 걸쳐 권력분점과 내각제 개헌을 근간으로 하는 연대에 합의, 11월초 이를 공표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박태준 의원까지 자민련에 입당하고 연대에 가세해 이른바 DJT연대를 출범시켰다. 대선의 물꼬를 DJ에게로 돌린 결정타였다.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도 이기택-조순 체제의 민주당과 3김체제 청산을 기치로 연대를 모색, 11월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이끌어내고 당명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또 DJ와의 연대에 불만을 품은 영남권 자민련 인사들은 대거 DJT 연대에서 이탈, 신한국당으로 옮겨왔다.
이동관기자 llddk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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