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내에 14개가 있는 영세민 영구임대 아파트촌 중 하나인 월성주공 2·3차. 1991년 입주가 시작된 후 줄곧 여기서 사는 윤원태(78) 할아버지는 주민들로부터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불린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난장판도 저리가라였지. 아파트촌 곳곳에 쓰레기가 넘쳐나고 술 취해 길바닥에 누운 사람, 싸우는 사람, 담배 피우는 아이들... 분위기가 험악했어". 그래서 할아버지는 팔을 걷어붙였다고 했다.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호통도 쳤다. "처음엔 대드는 사람도 없잖았지만 내가 힘으로 밀릴 사람이 아니지. 3, 4년 지나니 그런 모습들이 사라졌어. 나만 보면 전부 다른 곳으로 도망갔지"1995년 윤 할아버지는 3단지 경로당 회장을 맡으면서 또다른 일을 시작했다.
80여명의 노인들과 함께 폐지·빈병 등을 모아 판 돈으로 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시작한 것. 매달 1천700원씩 내는 회비도 모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3단지 부녀회장 민금순(63)씨는 파출부·공장일은 물론 건설공사장에도 나가 남자도 힘들어 하는 못 빼는 일을 맡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또 마을일을 시작한다.
8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김장을 담가 소년소녀 가장이나 홀몸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폐지를 모으는 것. 폐지 대금에다 조금씩 모은 성금을 보태 장애인과 백혈병 어린이 등 동네 사람들에게 힘이 돼 준다. "모두들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당장 일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같이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달려옵니다".
억척 민 회장에게도 IMF사태는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실직가장이 늘면서 함께 마을일을 하던 주부들이 어려움에 빠졌다는 것. 하지만 그렇게 떠났던 사람들도 지금은 하나둘씩 되돌아오고 있어 즐겁다고 했다.
2단지 모자가정 모임인 '한마음회' 회원들은 지난 6월 달서구지역 산악 모임인 '한마음 산악회'에 가입했다. 가난이 주는 자격지심을 떨쳐버리고 다른 주민들과 화합함으로써 희망을 스스로 만들어 가자는 뜻.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다고 쳐다보지 않을까도 걱정됐습니다. 하지만 남편 잃고 홀로 자식 키우며 살았던 세월보다야 더 어려울까 싶어 용기를 냈습니다".
김춘자(49) 회장은 "등산을 하며 일반 아줌마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식 걱정 고민이 비슷하더라"고 했다. 그런데도 왜 그동안 그렇게 열등감·소외감에 빠져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남들보다 적게 가졌다고 비관만 하지 말고 스스로 희망을 가꿔나가야 함을 깨달았다는 얘기.
주민들의 이런 적극적 사고는 다른 영세민촌에 없는 자랑거리를 만들어냈다. 매년 가을에 여는 마을체육대회가 그것. 부녀회장 민씨는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함께 부대끼며 내 고향, 내 마을이라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주민들이 한마음이 돼 잔치를 만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부자'를 어디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환했다.
"우리는 가난을 더 이상 운명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가난이 물러가지 않음을 압니다. 힘을 모아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대구 최초로 들어선 월성주공 영세민 마을(3천846가구) 사람들은 대구시내 14곳 1만8천744가구 5만여명 영세민들과 함께 희망을 개척해 나갈 것을 제안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