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문학인대회 참석한 김춘수 시인

우리시대의 큰 시인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 1일 대구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국문학인대회에 발제자로 초청돼 대구에 내려온 선생을 만났다. 팔순의 노시인은 여전히 꼿꼿했다.

그리고 멋쟁이었다. 아이보리색 와이셔츠에 보라색 넥타이 차림. 과연 영원한 모더니스트다. 지금도 시들어버릴 생화보다는 절정의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조화가 더 좋다는 선생의 말이 '예술은 인공이다'란 평소의 지론을 떠올리게 했다.

여윈 노구에도 형형한 눈빛이 흐트러지지 않은 문학정신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든이 되도록 시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까닭을 알만 하다. 지칠줄 모르는 시심은 몇일전 출간한 시집 '쉰 한 편의 비가(悲歌)'(현대문학)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선생은 이번 '비가' 연작시집이 인간존재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시화(詩化)한 것이라고 밝혔다. 팔십 인생을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인간존재의 양상.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에 대한 고독과 먼저 간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내면 깊숙히 침잠한 눈물처럼 투명한 슬픔의 변주곡이다.

릴케가 그랬던 것처럼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세계에 대한 작업, 이것이 어쩌면 '김춘수 문학'의 마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어. 나이도 있고. 앞으로 시를 더 쓸 수 있을런지…". 노시인도 그런 뉘앙스를 비춘다.시세계도 그렇다. 지난해 봄에 나온 '거울 속의 천사'란 시집에서부터 선생의 시는 사실상 '무의미'에서 '의미'로 회귀한 느낌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처음 듣는 얘기다.

"30년 동안 무의미 시를 추구해 왔어. 이상보다 더 극단적인 실험이었지. 결국 막다른 골목까지 갔고, 시를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다시 이전의 세계로 고개를 돌린 것이야".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회귀가 아닌 변증법적 회귀, 즉 오랜 무의미가 바탕에 깔린 의미로의 회귀임을 강조했다.

화제를 대구 이야기로 돌렸다. 선생과 대구의 인연은 각별하다. 20년간 대구에 정착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대구는 인생의 황금시절을 보낸 도시이기도 하다. 내당동과 만촌동에서 살던 시절도 어제 같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번/ 낙화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시 '수련별곡'을 남긴 것도 대구 동성로의 2층 찻집 세르팡에서다.

선생은 최근의 왕성한 작품활동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혼자남은 황혼의 슬픔과 외로움 탓인가. 선생은 문단 최고령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지난 5월 월간 '문학사상'이 창간 30주년을 맞아 실시한 '한국문인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선생은 최근 5년간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시인으로 꼽혔을 정도다. 선생은 '대치동의 여름'이란 싯귀에서 밝혔듯이 '쉰다섯 해를 이승에서 살과 살로 익히고 또 익힌'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주저없이 표현했다.

"내 인생의 9할은 그 사람이 가져갔어. 가고 나니 알겠어. 아내란 말이 그처럼 아름다운 말인 줄을…. 팔십을 먹도록 그걸 몰랐어". 선생은 자신의 분신이었던 아내가 자신보다도 자신을 더 잘 알았다는 것을 혼자가 되고서야 느낀다고 했다.

"후회막심이야. 갚지도 못할 빚을 왜 그리 졌을까". 선생은 그것이 한(恨)으로 남았다고 했다. 그리고 꼭 한 번만이라도, 아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슬픔이 하나'란 시는 그런 선생의 심중을 담고 있다.

'어제는 슬픔이 하나/ 한려수도 저 멀리 물살을 따라/ 남태평양 쪽으로 가버렸다/ 오늘은 또 슬픔이 하나/…/ 내일은 부용꽃 피는/ 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 슬픔이여'.

경기도 분당에서의 아파트 생활. 우두커니, 하루종일, 혼자…. 그리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 선생은 이처럼 고문같이 외로운 여생에도 결코 종교에 기대려하지 않는다. 끝내 허물어지지 않는 강인한 리얼리티. 그것이 김춘수 문학의 오늘을 지탱해온 모더니즘적 바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종교를 가지고도 싶은데 그게 잘 안돼. 내게는 시(詩)가 곧 종교지 뭐". 선생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승도 모르는데 저승을 어찌 알겠는가'란 공자의 말씀으로 대신했다.

그것은 곧 내세주의가 아닌 현세주의인 고대의 희랍정신과 상통하며 우리의 신라정신과도 맥이 통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끝내 모더니스트로서의 기조를 버리지 않았다 . 그러나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은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했다. 어쩌면 죽음이란 자체가 관념일 수도 있다고 했다.

노시인과 1시간 넘게 인터뷰를 마치고 마른 가을바람이 드센 거리로 나서면서 '일상의 덧없음'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산보길'이란 선생의 싯귀절을 하나를 떠올렸다.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보니 조막만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 주고 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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