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통마을-안동 권씨 문중 봉화 닭실

전통마을이 사라지고 있다. 현대화의 급물살 속에서도 아직은 수백년의 아름다운 명맥을 이어가려 애쓰는 우리의 전통마을. 그 마을들과 그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우리의 전통을 되돌아보기 위해 옛마을들의 오늘을 찾아간다.

수려한 자연과 전통의 향취가 어우러진 봉화군 봉화읍 닭실마을. 봉화읍에서 비티재를 넘어 철교밑으로 좌회전한뒤 다리를 건너면 닿는 마을이다. 특히 석천이 끝나고 내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삼계교를 지나 삼계서원과 석천정사를 거쳐가는 옛길로 가면 기암괴석과 맑은 물, 은빛 모래, 송들이 한데 어울린 풍광이 가히 명당으로 불릴만하다. 산기슭을 따라 늘어선 고풍스런 기와집들은 한눈에 반촌임을 보여준다.

암수 닭 두 마리가 날개쭉지를 펴 알을 감싸안은 듯한 형국(金鷄抱卵形)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닭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집성촌의 하나로 꼽히는 이곳은 파평 윤씨 외손인 권벌(1478~1548. 호 충재. 시호 충정공)이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난 이듬해(1520년) 이리로 들어오면서 안동 권씨 가문의 세거지가 됐다.

충재 종가마을과 중마·구현 등 3개 마을을 합쳐 행정구역상으로는 유곡 1리다. 주민 수는 모두 77가구 190여명. 이중 종가 인근을 일컫는 닭실에23가구 65명, 중마에 20가구 50여명, 구현에 21가구 50여명이 각각 살고 있다. 특히 닭실의 종택 주변에는 안동 권씨들만 살고 있고, 타성 4가구 10여명은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닭실 주민 65명은 남자 30, 여자 35명, 최고령자는 17대 종부 류한규(81)할머니와 종손 권정우(80)옹이다. 40, 50대 2명 외엔 모두 60세 이상이라평균 연령이 60대 중반이다. 젊은이들은 죄다 대처로 나가버려 아기울음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모를 정도다.

"한때는 120여 가구에 달한 적도 있었지요". 차종손 권종목(60)씨는 "닭실 사람 모두가 충재 후손인데다 타성 4가구도 외손이라 주민 전부가 혈연관계"라고 말했다. 늦가을 내음이 물씬나는 고샅길로 접어드니 몇몇 고가들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퇴락해 있고 어떤 집들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인 듯하다.

양옥과 반양옥 주택도 몇 채 낯선 객처럼 뒤섞여 있다. 송재규(75) 할머니는 "집도 함부로 못짓게 하고, 내년에는 동네의 시멘트길도 걷어낸다더라"하면서도 "다 동네를 위하고 문중을 위한 일이라는데 참아야지"라고 말했다.

마을사람들의 생활은 자연히 중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충재 종택은 마을 끝에 있는데 솟을 대문이 위 아래가 휘어진 달모양의 월문(月門)이다. 전형적인 영남반가의 입 구(口)자형 구조로 1939년에 개축됐다한다. 충재유물관에는 충재일기와 근사록 38종 184책 198점의 전적, 고문서, 유묵 등 5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충재 유적과 청암정,석천정을 껴안은 닭실의 빼어난 자연경관덕에 마을단위로는 처음으로 1963년 사적지 및 명승지 제3호로 지정될 수 있었다고 주민들은 자랑했다.

닭실사람들은 선조임금에 의해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불천위(不遷位)에 명해진 충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17대 종손 권정우(80)옹은 "불천위 제사는가문의 큰 자랑거리"라면서 "불천위 뿐 아니라 일년에 11번 있는 기제사때 각처의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일족의 정을 나눈다"고 말했다.

평생 비녀를 빼본 일이 없다는 17대 종부 류한규 할머니는 "17살에 하회서 시집와 64년간 수많은 제사를 모시면서 종가의 맥을 이어왔다"며 지난날을되돌아 보았다. 특히 음력 3월의 불천위 제사때는 대처에 나가있는 며늘네들까지 다 모여서 음식을 장만하는데 제사음식 풍습이 좀 색다르다. 제례때 흔히 쓰는 시루편 대신 하얀 동곳떡을 할머니에겐 23벌, 할아버지에겐 25벌씩 올리고 화전이나 잣과편 등 11가지를 웃기떡으로 올린다.

제사때 생고기를 쓰는 것도이색적이고 오색강정도 빠뜨릴 수 없다. 각종 한과와 진설편·국화주·북어보푸라기 등도 닭실의 의례음식으로 대물림되고 있다.

옛날엔 봉화·안동은 물론이고 충청도 청풍, 전라도 나주, 황해도 연산과 평산, 함경도 길주에까지 외방노비를 두었을만큼 권씨네 농토가 많았다한다.6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중마·송생이·사그막골 등 3곳의 제궁에는 타성받이들이 권씨네의 소작농으로 일하면서 묘소관리니 제수준비, 땔감준비 등을 해주었다고 한다.

요즈음도 마을의 19가구는 직접 농사를 짓지만 종가 등 4가구는 옛풍습을 따라 소작을 주고 있다. 닭실에서는 지난날 문과 16명, 소과 59명, 참판 2명 등이 배출됐고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가 90여명이 될 정도로 번창했다.

광복 후에도 2명의국회의원(8.9대 권성기 9대 권효섭)과 2명의 차관(권성기 권원기)을 배출해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석천정사를 지키는 권종(77)옹은"예전엔 비 올 때 추녀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안맞고 다닐만큼 집도 많고, 대단했지. 일제 말엽에 산허리를 자르는 바람에 맥이 잘려버렸어. 조상님들께 죄스러울 뿐이지 뭐"라며 아쉬워했다.

지금의 닭실은 여느 오래된 마을들과 마찬가지 고민에 직면해 있다.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에 따라 고가옥을 보수하고 전기 지중화작업, 새 길 등 마을정비를 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도 문중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자꾸만 엷어져 가는 현실에서 조상이 남긴 전통에 대한 책임감도 강하게 느끼고 있다. 현대화의 급물살 속에서 전통의 계승발전을 둘러싼 갈등을 닭실사람들이 어떻게 잘 조화해 나갈지 궁금하다.

봉화.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