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친구의 고백

소록소록 이자가 달라붙는 저금통장보다 훨씬 소중한 친구가 나에겐 있다. 그를 만나지 못해도 그를 떠올리면 괜히 즐겁다. 지금 그는 캐나다에 살고 있다.5년 전 이민 보따리를 꾸릴 당시에 그 친구는 방송사 PD란 직업을 버렸고, 그의 아내는 교편을 놓았다. 돈계산에 유난히 명민한 사람들이 '중소기업 사장네보다 낫다'는 돈벌이 조건을 용감하게 팽개치고 떠난 것이다.

캐나다에서의 내 친구는 정원사(庭園師), 좀 깎아서 말하면 '잔디깎이'로 변신했고, 그의 아내는 어설픈 영어 덕분에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하지 못해 안달을 부린단다.

1980년대, 그는 이 땅에서 살고 있었고,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이 어마어마한 홍수로 둔갑하여 서울을 물바다로 만드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온 국민을 불안의골짜기로 몰아넣고 있었을 때, 그는 PD 초년생이었다. 그때 우리는 평화의 댐을 '노아의 방주'쯤으로 여기게 만드는 언론의 난리법석에 따라 얼마나 순순히 성금을 냈던가!

그 까마득한 기억을 최근 내 친구가 전자우편으로 보내온 에세이 '어느 할머니의 눈동자'가 되살렸다. 당시의 성금모금 방송에 동원된 내 친구가시골 할머니를 상대로 연출했던 사기극을 털어놓은 글이다.

TV에 얼굴 한번 나오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었고 드디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을 앞세웠을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꼬깃꼬깃 구긴 지폐 두 장을거머쥐고 카메라 앞에 등장한다.

아나운서와 할머니가 몇마디 나눈다. "이 성금은 어떻게 마련하신 건가요?" "고깃배 타가 번 거시더.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 캐가요" 등등…. 할머니는 인터뷰가 너무 짧은 것에 실망하는 눈치로 카메라 렌즈와의 눈싸움을 얼른 그만두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사기극인 까닭은 테이프가 없는 카메라였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의 눈동자를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는 내 친구는 그 글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변명의 가치도 없는 변명을 하자. 거짓의 시대, 그 한복판에 내 청춘이 머물렀음을…".

소설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