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표절 문화

지식산업의 발달로 창작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표절'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관계의 시비는 논문에서부터 문학작품·미술작품.영화.가요는 물론 지적 창작물과 관계된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창조'에대한 찬양이 산을 이룰 정도라면 '표절'이나 '모방'에 대한 비난은 천길 절벽과도 같다. 희랍어로 표절(Plagios)은 '근성이 나쁜 사람'이라는뜻이지만, 이 행위는 명백한 도둑질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없지 않으나, 에머슨의 경우 표절은 고사하고 모방마저 '자살'이라 했다.

▲미국 사회는 창조적 고통에 대해 부와 명예를 주는 한편 표절 행위는 가혹하게 처벌한다. 우수한 두뇌를 수없이배출하는 배경에는 창의를 존중하는 문화와 표절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지적재산권' 관련법 집행이 뿌리깊게 자리매김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세계적인 거부 빌 게이츠는 미국의 독특한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낸 '순정 미국 제품'이라는 말에 수긍이 가고 공감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정길 전 법무장관의 퇴임사가 상당 부분 이명재 전 검찰총장의 '대 국민 사과문'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났다.A4용지 3장반 분량 중 첫 장 13문장 가운데 11문장이 거의 같고, 전체적으로 73%나 표절됐다 한다. 특히 일부 문장은 정확히 일치하고,네 번째 문장은 이 총장의 사과문 세 번째 문장과 '검찰총장으로서'가 빠진 것 외에는 똑같으며, 네 번째 문장부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10개 문장 중 9개 문장은 일부 토씨와 부사가 첨삭 가감됐을 뿐인 모양이다.

▲이 문제로 논란이 일자 김 전 장관의 퇴임사를 작성한 오병주 법무부 공보관이 '전화로 부르는 퇴임사를 받아 적었으나 시간이 없어 정리하지 못하고 취지가 비슷한 이 전 총장의 사과문을 베꼈다'고까지 시인했다니 한심하고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퇴임하는 심정이 이 총장과 같다는 의미로 해석하기에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정중하게 사과하며 자리까지 물러나는 장관이 어떻게 '슬갑 도적'에 가까울 지경으로 무책임할 수 있었을까.

▲일찍이 작가 미즈너는 '한 저자에게서 도둑질하면 표절이요, 여러 저자에게서 도용하면 연구'라고 꼬집은 바 있다. 다양한수법으로 표절하고도 아무 일 없이 버젓이 고개를 들고 다니는 풍토를 개탄한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는 표절에 너그럽고둔감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표절 시비를 제기한 사람이 되레 이단자처럼 몰리는 경우마저 없지 않았다. 지식산업 전반에 보편화돼 있는 표절 문화가 근절되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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