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집-빌딩숲 속 시골집

'집'을 키워드로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를 읽어낼 새 기획을 시작한다. 사람은 집에 살고, 집은 사람을 닮아간다. 다양한 집의 형태와 구석 구석을 살펴보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계획이다. 그리고 좀 더 살기 좋고 예쁜 집을 만들고 꾸미는 방법도 알아본다.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서촌(혹은 서면) 마을. 10년 전까지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던 이곳은 지금 대단위 아파트와 빌라가 거인처럼 자리잡고 있다. 얼마전 개구리 소년들의 주검이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다.

지난 5,6년 사이 엄청나게 많은 아파트가 들어섰고 땅값은 천정부지로 오른 것이다(용산동에는 2001년 12월 말 현재 26개 단지 2만2천여 가구가 들어섰고 올해 연말까지 3,4개 단지 수천 가구가 더 들어설 예정이다). 도시인들이 물밀 듯 밀려왔고 없던 대로가 속속 생겨났다.

그러나 아파트와 빌라, 자동차의 굉음 속에 10여 채의 기와집이 섬처럼 숨어 있다. 행인은 그곳에 그런 집이 남아 있음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성주 도씨(星州都氏)의 집성촌. 마을을 형성한 지 수백 년이 넘었다는 이 마을은 한 때 70, 80여 호에 달했지만 하나 둘 도시로 떠났다.

10여 채의 집 중에 유난히 예스러움을 간직한 손둘래(83) 할머니의 집. 아들 딸 6남매를 비롯해 가족들이 북적대고 소가 되새김질을 하던 마당은 채마밭으로 변했다. 빨랫줄은 초겨울 바람에 혼자 떨고 있다. 한때는 대가족의 빨래로 축축 늘어지던 줄이었을 것이다.

된장, 고추장을 가득 담아 두던 커다란 장독들은 텅 빈 몸뚱이로 서 있다. 손 할머니는 커다란 장독 하나에 15명 가족의 된장을 다 담글 수 없어 작은 장독에 따로 장을 담그던 시절을 추억한다. 아들딸이 떠난 집엔 더 이상 된장국을 맛나게 먹을 사람도 없다. 느리게 되새김질하던 소도 없고 소를 키울 사람도 소를 써 갈아붙일 논밭도 없다. 빌딩 숲 속에 외롭게 남은 옛 집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손 할머니의 말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섬처럼 남은 시골집을 지키는 손둘래 할머니의 하루는 바쁘다. 초겨울임에도 마당은 온통 푸르다. 사람이 떠나고 소가 떠나고 농기구가 사라진 마당은 온전히 손 할머니의 채마밭이 된 것이다.

채마밭에는 상추, 시금치, 배추, 무, 파가 자란다. 가지와 고추는 벌써 다 따냈다. 이제 조금 더 추워지면 지난 7월에 심었던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을 담글 작정이다. 호박은 맛보다 커 가는 모양을 보는 재미가 더 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없던 알이 달렸고 하룻밤 자고 나면 몰라보게 굵어져 있다. 80평생 보아왔지만 식물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모습만큼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도 드물다.

손 할머니의 채소 키우는 솜씨는 도시의 웬만한 정원사 못지 않다.

"씨를 뿌릴 때는 마른 땅에 물을 흠뻑 주고 완전히 스며든 다음에 뿌려야 해. 흙이 마르지 않도록 낙엽이나 짚 풀을 덮어 주면 물을 줄 필요도 없고". 할머니가 별로 넓지 않은 마당에 여러 가지 채소를 섞어 심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연작장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올해 무를 심었던 자리에는 내년에 시금치를 심고 올해 상추를 심었던 자리에는 내년에 파를 심는 식이다.

할머니는 채소간의 궁합도 안다. 가지는 콩과 함께 심어야 좋고 시금치는 대파와 섞어 심으면 좋다. 지금 할머니의 파 이랑 옆에는 시금치가 막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대구시 용산동, 불과 7,8년 사이 땅값과 집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손 할머니의 집 값은 얼마쯤 될까.

"주인은 알고 계셨는데…나는 모르지". 손 할머니는 집 값이 얼마쯤 되는지 집이 몇 평쯤 되는지 생각해본 일이 없다. 나이 때문이 아니다. 손 할머니 시대에 집은 아버지나 남편 혹은 아들의 문제였다. 손 할머니의 친구 세사람도 똑같은 말을 한다. 집에 관한 한 모두 '주인=남편'이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는 말이다.

손 할머니는 19세 때 시집와 살아온 이 집이 죽는 날까지 개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도시에 나가 사는 자식들은 혼자 남은 노모가 걱정되는지 연일 도시로 나와 같이 살 것을 청해온다. 그러나 손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손을 내저으며 "여기가 더 편하다. 걱정 마라"며 자른다.

"내가 3, 4층집에 가서 감옥살이 할 필요가 뭐 있어?" 손 할머니는 도시의 계단 많은 집은 노인들에게는 감옥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시골집에서 채마밭 가꾸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생활이 즐겁다.

"공원에 매일 나가는 노인들 이야기 텔레비전에서 봤어. 도시 노인들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일 말고 뭐 할 일이 있어? 시골에 사는 노인에게는 할 일이 많아". 국내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380만명. 많은 퇴직한 도시노인들과 달리 빌딩 숲 속의 시골집을 지키는 손 할머니는 아직 현역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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