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시간은 강물처럼

길의 초입에는 방죽이 있고, 작은 언덕이 있고, 포플러로 에워싼 운동장이 있고, 풍향계가 돌아가는 면사무소가 있고, 묵은 살구나무 몇 그루가 있다. 살구나무 분홍꽃의 화사한 빛깔 때문에 어떤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의 춤 때문만도 아니다.

살구나무 그늘에 서면 마을은 조용하고 포근하게 누웠고,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돌각담들이 바람이 불 적마다 나뭇잎이 물소리를 내며 우는 강둑의 풍경이 시야 밖으로 들어온다. 하필 그런 풍경이 시를 노래하는 그리움을 줄까. 하나의 풍경이 내면에 스민 어떤 전형성이 그리움이라는 영감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길에는 내가 사랑하는 마을의 이름들이 늘어서 있다.

동강리.계전리.소월리…. 그 마을을 지날 때마다 미세한 그들만의 숨결을 들려준다. 까맣게 익은 열매를 달고 마당 거름 무더기 옆에 자라는 까마중 같은 마을 사람들의 구수한 얼굴이나 살 냄새…. 그럴 때 나는 길을 멈추고, 바람개비로 돌아오던 길가에 서서 시 한 편을 쓰기도 한다.

그 곳에도 세월이 흘러 인정도 강물도 변한다. 노적가리 쌓아 올리던 논마당에는 러브호텔이라는 이름의 집들이 서 있다. 내 문학의 감수성의 모태가 된 동강리에서 계전리로 물굽이가 돌아가는 피라미떼 뛰놀던 강가의 맑은 갈대숲에는 분뇨 탱크가 갈대밭 가운데 축조되어, 그것 때문에 강물이 오염되어 냇가 어디를 가도 청람풀꽃 하늘대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변한다. 좋은 쪽으로 변하지 않고 나쁜 쪽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슬퍼진다.무학산에 서설이 내리면/봄이 길다/ 분이 시집가던 날/ 한 닷새 눈이 왔다/ 첫날 밤을 눈이 붓도록 울고/ 읍내로 시집간 분이는/ 한 번도 친정엘 오지 않았고/ 무학산엔 서설이 내리지 않았다.

이 시에는 분이가 시집을 가고는 친정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데 있다.계전리에 산 분이는 경북여고 재학시절에 시집을 갔다. 분이가 시집을 가던 날부터 오기 시작한 눈이 한 닷새 계속됐다. 눈은 분이의 슬픔을 덮어주기라도 하는 듯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루진이 방황하던 눈벌판처럼 천지가 하얗게 내린 눈으로 앙앙 울어댔다.

꿈이 많았던 어린 분이를 억지로 시집을 보낸 어른들에 대한 분노로 이 시를 쓰게 된 것이다. 결혼 전에 입술을 빼앗겼다고 자살을 했다는 순진한 사람들이 살았던 한 시대의 이야기 일까.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물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종달이.영태.수길이.오종인, 그리고 갈래 머리 분이/ 옛 이름이 저절로 입에서 나온다/ 양철지붕이 초가 대신 태양에 반사되고 있었고/ 멀리 못물이 미이라처럼 누워 있었다.

〈'옛 동산에 올라서'의 일부〉

이 시를 '현대문학'에 발표했다. 동향인 구활 형이 매일신문사 안동 북부지사장으로 있을 때, 시를 잘 읽었다고 전화를 준 적이 있다. 고향으로 갈 때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낮게 엎드린 야산을 보게 되고, 지나치는 마을 입구마다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보게 된다. 이따금 차창 저편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곤하는 강물과 못물에 눈을 주면서 생각에 잠기곤 한다. 봄이면 산과 들에는 잎이 돋고 꽃이 핀다.

여름을 넘기면 나무들은 물이 들고 하나씩 잎을 떨어뜨리며 가을이 간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내 손에 내 얼굴에 주름을 남기며 시간은 강물처럼 그렇게 흘러가리라.

내 생애의 강물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언젠가는 다 가지고 갈 것이다. 고향으로 갈 때마다 이런 따위의 감상에 사로잡힌다.

나에게 남아 있는 고향의 이미지는 부호의 딸을 아내로 삼아 궁정시인으로 영달한 자허지부(子虛之賦)의 사마상여가 세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금의환향하는 이미지가 아니고, 동구 밖 키 큰 회나무가 바람속에 떨고 있는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속에 내가 걸어갈 작은 길이 보이는 것이다.

도광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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