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통마을-영덕 괴시마을

오늘날 우리에게 전통(傳統)의 의미는 과연 뭘까? 옛것을 지켜가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인가, 아니면 케케묵고 낡아빠진 것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가. 고가(古家)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 중 하나인 영덕군 영해면 괴시(槐市)마을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괴시마을은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이 자신의 출생지와 중국 괴시가 닮았다 해서 이름을 붙였고, 400여년 전부터 영양 남(南)씨의 세거지로 내려오는 유서깊은 곳이다.

그곳을 찾기란 비교적 쉬웠다. 동해안 7번국도가 지나는 면소재지에서 차로 불과 5분 거리. 148가구 460여명이 살고 있을 정도로 마을 규모가 제법 컸다. 나지막한 야산을 뒤에 두고 북쪽에는 19세기에 지어진 고가 22채가 나란히 붙어있고, 그 반대편에는 여느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집들이 늘어서 있고, 심지어 10년전에 건축된 3층 빌라도 눈에 띄었다.

산골의 외딴 마을이 아닌데도 고색창연함이 살아 숨쉰다는 자체가 흥미로웠다. 동행한 영덕군 유교문화담당 학예사 김상현(36)씨는 "20여년전만 해도 대구·안동 등 큰 도시와 도로망이 연결되지 않은데다 일제시대 군소재지가 영덕으로 폐합되면서 발전이 더뎠다"고 설명했다. 결국 전통의 유지는 사람의 손길과 관심이 미치지 않아야 가능했다는 법칙성을 여기에서도 발견한다. 최근에는 대진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과 2, 3k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피서철이면 사람들이 꽤 오가는 편이라고 한다.

괴시마을은 도시화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마을 곳곳은 올초부터 계속된 공사로 인해 어수선했고, 주민들도 다소 들떠 있는 듯했다. 마을앞에는 대형 주차장 조성공사가 한창이었고, 고가 주위에는 인부들이 벽을 바르고 지붕을 손질하고 있었다. 영덕군이 조만간 고가 보수를 끝내고 목은기념관까지 완공해 내년쯤 '민속마을'로 지정받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 남씨 세거지에 목은기념관이 들어선다는 것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유교적이면서도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여서 자신들의 혈족이 아닌데도 무난하게 수용하는 것 같았다. 현재 터파기 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내년 2월이면 마을안 산아래(목은의 출생지로 추정)에 세워지는 口자형 목조기와집에서 그의 향내를 맡게 될 것 같다. 결국 영덕군은 이곳을 안동 하회마을 못지않은 관광객들이 들끓는 전국적인 명소로 만든다는 복안을 가진 듯하다.

이곳에서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 영해향교와 남씨 소유 고가 13채. 그런데 즐비한 고가 주위를 뛰어놀던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성장했을까하는 궁금증이 든다. 3·1운동 당시 이곳 출신 4명이 주동자로 일경에 체포됐을 정도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많았고 마을사람들은 이를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요즘도 매년 3월 18일이면 3·1절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갖고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이곳 출신들이 학계·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특히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고가들은 경주댁, 천전댁, 대남댁, 주곡댁 등 사람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불렸다. 그 집 안주인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지만, 요즘이 아니라 대개 100년전, 3대(代) 이전부터 계속 사용돼온 명칭이라는 게 이색적이고도 재미있다.

'주곡댁'이라 불리는 고가에 사는 이진기(74)할머니는 口(입구)자집 마당과 마루에 세간살이를 모두 꺼내놓은 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17세때 남씨 문중으로 시집와 이 집에서 50여년을 살아왔다는 이 할머니는 지난 3월 시작된 보수공사로 인해 옆집으로 세간을 옮겼다가 다시 집안으로 들여놓는 중이라고 했다. "얼마전만 해도 집안 곳곳이 부서져 빗물이 새곤 했는데 늙은 사람들이라 고칠 엄두도 못냈지. 군청에서 다 고쳐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예전 나들이객에겐 이곳의 이끼낀 기와와 중후한 토담이 큰 볼거리였다고 하는데 실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어떠했을지 새삼 짐작이 된다. 하지만 올해 기와를 갈고 벽을 단장하는 보수공사로 인해 그같은 정취마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가가 몰려있는 마을 한쪽은 각종 공사로 북적대지만, 그너머 다른 한쪽은 여느 농촌마을마냥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이장 남이륙(64)씨는 "이제는 마을에 남씨(50호 70여명)가 소수여서 문화재 지정을 놓고 의견이 엇갈려 애를 먹었다"면서 "안동 하회마을처럼 관광객이 너무 붐비지 않으면서도 바람직한 형태의 민속마을이 됐으면 좋겠다"고 걱정했다.

전통은 반드시 관광 마인드와 결합돼야만 보존이 가능한 법일까. 그것밖에 현실적 해결책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저 방관자적 입장에서 곱씹어보는 상념일 따름이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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