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비바라이프-잊혀진 이웃들의 질펀한 삶 '크로키'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일이 벌어지고 힘도 난다. 사람이 모인 자리라 때로 다툼도 없지 않지만 공동체 사회를 일궈내는 힘의 원천은 바로 사람이다. 함께 어울려 신명나는 사회, 비바(viva) 라이프를 만들어가는 이 땅의 사람, 사람들을 찾아 소개한다. 〈편집자주〉

서민들의 삶의 얼룩이 묻어 있는 대구의 골목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닌 사람들이 있다. 때로 잘려나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 남아 시대와 역사를 증언해주는 골목과 한바탕 씨름한 사람들. 대구시종합자원봉사센터 문화자원봉사단이 그들이다.

골목문화는 삶과 문화가 있는 골목을 되찾아가는 작업이자 대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작업이다. 잊혀진 골목과 그 골목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의 그림자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일. 지난 3월부터 7개월 넘게 이어진 이 작업에는 대학생과 직장인, 주부 등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 이 작업에 뛰어든 이들은 모두 15명. 볼룬티어(volunteer.자원봉사자)의 이름으로 모여 막상 시작한 일이지만 그 의미만큼이나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문화자원봉사단은 지난해 11월 발족했다. 대구의 문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되새김하고 다양한 문화자원과 프로그램을 통해 대구의 정체성을 시민들에게 인식시키고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취지였다.

대구시종합자원봉사센터 전문자원봉사단의 하나로 출발한 이 모임이 처음 꾸민 일은 화장실문화가꾸기 캠페인. 월드컵, 하계U대회 등 굵직한 국제 행사를 앞두고 대구지역 화장실 실태조사 등 선진 시민의식을 높이는 문화자원봉사 프로그램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골목문화를 찾아가는 일은 문화자원봉사단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사실상의 첫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3월 문화자원봉사단 1기 모집 광고를 통해 모인 사람은 40여명. 연세 지긋한 중년의 신사에서부터 대학생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원봉사 대열에 참여했지만 생소한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담감 때문에 하나둘씩 중도에서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15명. 어렵사리 골목을 찾아 나섰지만 골목 사람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깟 골목이 뭐 대수라고…. 하지만 봉사자들은 한여름 뙤약볕에 팥죽같은 땀을 흘리며 골목길을 더듬어 오르내리고 꼼꼼히 지도를 그려냈다.

자원봉사에 나선 주부 김영옥씨의 이야기. 열심히 간판을 쳐다보며 노트에 기록하는데 지나가던 경찰관이 한참을 들여다보더란다. "뭡니까? 뭐할라꼬 그리는교?"라며 수상쩍은 눈초리로 이것저것 묻는 통에 여간 곤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오래됨직한 가게를 찾아가 골목의 유래에 대해 물으면 시장 상인들은 귀찮아했다. "몇번짼교, 와 왔다갔다 하능교?"라는 핀잔이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시련에도 자원봉사자들의 발품은 계속됐다.

기존 자원봉사와 성격이 다른 문화봉사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갖고 모임에 참여했다는 김은미(26.대구산업정보대 직원)씨는 "한번 답사에 2, 3시간씩 소요되는 등 시간투자가 적지 않았지만 주말마다 색다른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골목길을누비면서 대구에 대해 보다 깊숙이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말한 김씨는 더욱 체계적으로 공부해 골목문화해설사로 대구 알리기에 한몫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발품에 결실이 맺어졌다. 지난 10월말 대구 골목문화 가이드북 '골목은 살아있다'가 세상에 선보였다. 문화봉사단 자원봉사자들이 겪은 숱한 사연과 함께 수십년간 골목을 지키며 살아온 터줏대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이드북이다.

이 책자는 대도시의 후미진 한 켠에 숨어 있지만 서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녹아 있는 대구 골목문화의 의미를 처음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75쪽 분량의 도톰한 이 가이드북을 펼치면 읽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골목의 역사적 배경과 상세한 지도, 일반인들이 몰랐던 생활사가 빼곡하게 담겨 있어 이제까지 나온 다른 가이드북과 차별된다.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이 쏟아졌다. 가이드북을 접한 시민들은 "좋은 기획이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동안 개인적으로 모은 자료를 제공하겠다"며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문화자원봉사단 실무를 맡은 사회복지사 최명숙씨는 "첫 성과를 바탕으로 시민들이 골목들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골목 안내표지판을 세우는 일도 이들의 바람이다. 이번 가이드북 발간에 참여한 1기 자원봉사자들이 보다 체계적인 공부를 통해 골목문화해설사로 성장해가는 것도 과제다. 그 일환으로 봉사단은 시민들을 대상으로한 골목답사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지난주말 중구청 공무원 20여명이 봉사단의 안내를 받으며 이 골목 저 골목 답사에 나섰고 일반 시민들도 중구 일대 골목길 순례에 나섰다. 오는 23일에도 골목답사가 있을 예정. 또 대구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대구인들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골목문화 가이드북을 외국어로 번역해 출간할 계획이다.

삶의 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도시의 골목. 골목에서 찾은 문화는 화려한 무대와 달리 생동감이 꿈틀거리고, 생생한 현장감은 그 어디에도 비할 데 없다. 후미진 골목이 살아있는 문화의 현장이 되는 데 힘을 보탠 문화자원봉사단의 '대구 깊이 알리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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