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라톤영웅 손기정옹 15일 타계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손기정옹은 일제의 압제에 숨죽이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제패로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떨쳤음은물론 민족의 좌절과 영광이 교차했던 20세기 한국체육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손 옹은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구멍가게와 행상을 하던 부모의 3남1녀중막내로 태어났다.2km에 이르는 통학길을 매일 뛰어다녔던 그는 별다른 놀이가 없던 우울한 시절을 달리기로 달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어머니는 공부는 안하고 운동만 좋아한다고 억지로 여자고무신을 신겨가며 말렸지만 손기정은 고무신이 벗겨지지 않게 새끼줄로 묶고 달릴 정도로 뛰기를 좋아했다.재미삼아 했던 달리기 실력을 인정받게 된 것은 31년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했던 조선신궁대회 5,000m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육상특기생으로 양정고보에 입학한 손기정은 33년 첫 마라톤 풀코스 도전이었던 조선신궁마라톤에서 2시간29분34초로 우승했고 35년 11월 올림픽 일본대표선발 예선전에서 2시간26분42초의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으로 올림픽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손옹은 세계 무대를 제패했지만 기미가요가 울리는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고 금메달은 영광 못지 않게 깊은 상처로 가슴에 박혔다.

또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어딜 가나 감시의 눈초리와 뒷조사에 시달려야만 했다.홀로 달리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절감한 손기정은 지도자로 나섰고 그가 사재를 털어 키운 서윤복(47년)과 함기용(50년)은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하기도 했다.

해방후 타계할 때까지 지도자의 자리에서, 때로는 원로의 자리에서 한시도 마라톤과 육상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손기정에게 육상계는 진 빚이 많다.'황영조 기념관'이 바르셀로나올림픽 후 7년만에 세워졌지만 손기정의 소중한 기념품들은 창고 구석에 박혀 있다가 최근에야 육영재단이 어려움 끝에마련한 작은전시관으로 옮겨져 개관을 서두르고 있다.

또한 손기정을 '민족의 영웅'으로 추켜세우다가도 막상 그가 지치고 병들었을때 도움의 손길은 그리 많지 않아 손 옹은 아들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나마 지난해부터 삼성그룹이 치료비 전액을 부담해 손 옹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손 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우리 민족이 뛰는 한 그가 이룬 쾌거와 스포츠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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