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상희칼럼-향토 역사박물관 건립

1996년 한여름 필자는 어떤 역사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 미혜현(三重縣) 구마노시(熊野市)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다행이 인근 와카야마에 거주하는 일본인 친구의 소개로 구마노 역사 민속 자료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구마노시는 인구 10만 미만의 조그마한 도시에 불과하고 비교적 넓은 규모의 자료관이 있었고 그 안에는 시와 관계되는 방대한 역사자료와 민속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그런데 진열실 한 곳에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유물 수십점을 진열해 놓고 일일이 설명서를 붙여 놓고 있었다.

그 중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때 그곳 성주가 조선에 출전하여 약탈해 온 물건들이었다. 그곳 관장은 나를 어느 한 장소로 안내하여 진열장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정구공 크기의 흙덩이 여덟 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이곳에 포로로 잡혀온 일곱 사람의 도공들이 가지고 온 한국의 고령토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관장의 호의로 그 고령토흙 두덩이를 기증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필자는 자료관을 나오면서 이 자그마한 시에서 과분할 정도의 훌륭한 역사자료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또 어쩌면 보잘 것 없는 그 흙덩이 몇 개를 그렇게도 소중하게 보관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 고장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시민정신에 깊은 인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필자는 우리나라 각 지방의 향토사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골동품이나 고서점에서 우연히 대구나 경북과 관련이 있는 자료를 만나게되면 그것을 입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을 입수하지 못하면 서운한 느낌을 가지곤했다.

작년 어느 날 서울 인사동에서 개최되는 경매전에 들렀더니 일제시대때 대구에서 발행되었던 '대구일일신문'의 창간호와 제 2호가 경매 대상물로 나와 있었다. 필자도 응찰에 참가했다. 처음 경매가 시작될 때는 5~6명이 응찰했으나 가격이 오르면서 필자를 포함해서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지금 경매에 참가하고 있는 저 사람은 모 대학의 신문방송학과 교수인데 연구목적으로 꼭 이 자료를 사고 싶어 하니 양보를 해주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값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같은 경쟁자가 학문연구를 위해 그 물건을 필요로 한다는데 그 만 마음이 약해져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또 몇 년 전 어느 고서점에 들렀을 때 주인은 금고에서 깨끗하게 장정된 여덟 개의 서류철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그 서류는 조선조 후기에 경상감사와 선산군수와의 사이에 하달 또는 보고된 수년간에 걸친 공문서로서 당시의 도, 군간의 행정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예상대로 값은 수 천만원을 호가했다. 무척 탐이 났지만 필자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어 구경만 하고 돌아서니 씁쓸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그 후 그 자료의 행방을 알아보았더니 서울에 있는 어느 사립대학의 도서관에 있다고 했다.

대구나 경북에 역사박물관이 있었다면 응당 그곳으로 가야할 자료 였었고 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바람직한 사회변화추세의 하나로 지방화 시대를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방문화의 창달을 많은 정책가들이 입버릇처럼 뇌이고 있다. 지방문화수준의 향상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그 지방의 역사박물관 또는 향토사료관의 건립은 반드시 추진해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서울에는 이미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되었고 지방의 중소도시 몇 군데에도 건립된 곳이 있다. 또 그 지방과 관련이 있는 특수한 자료를 전시하는 특수박물관이 설립된 곳도 있다. 그런데 영남의 중심도시로 어느 도시 못지 않게 오랜 전통을 가진 대도시 대구에는 아직 역사박물관이 없다.

이제 대구에도 역사박물관을 설립할 때가 된 것 같다. 아니 벌써 늦었다. 이제부터라도 서서히 박물관에 소장할 자료라도 수집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자료는 일실 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박물관의 건립은 지방화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중요한 현안의 하나가 되고 있다. 어쩌면 어느 한곳의 도로 개설 보다 우선순위가 훨씬 앞설 수도 있을 것이다.

전 대구시장,영광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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