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성로를 중심으로 한 유명 성형외과에는 가을에 접어들면서 여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한 병원을 찾은 여대생 김모양은 무조건 '예쁘게 보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여학생은 몇 군데 회사에 원서를 넣은 후 면접일자가 다가오자 속을 바짝 태우다 용기를 내서 병원을 찾아왔다는 것.
매일 밤잠을 설치다가 이럴바엔 성형수술이라도 받아두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고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고 했다.김양은 취업준비는 충실히 해왔지만 자신의 외모가 취업 때, 특히 면접때 합격여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미치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더라고 말했다.
이 병원에는 졸업·취업시즌을 앞두고 얼굴을 고치려 스스로 병원을 찾거나 부모나 친구의 권유에 떠밀려 오는 여고생·여대생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눈·코 등 얼굴인상을 부드럽게 보이도록 해달라는 주문. 취업에 유리하도록 예쁘게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이들 중엔 성형붐에 편승하거나 부질없는 열등감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 비교적 잘생긴 얼굴인데도 특정연예인과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며 막무가내로 수술 스케줄을 잡아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고.
"내원 환자 열명 중 2, 3명은 별로 고칠 데가 없는데도 수술을 고집한다"는 게 전문의의 귀띔. 얼토당토 않게 고집을 부리는 환자를 달래다 심한 반발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업계 여고생들에겐 '겉모습'을 예쁘게 바꾸려는 욕심이 사치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함이 없지도 않다. 이들은 애당초 취업을 목표로 실업계에 입학했기 때문에 취업이 안된다면 큰일. 대다수 중소기업체의 단순 사무직이나 보조직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는 한층 심한 편이다.
모 여자정보고 2학년에 재학중인 주원(가명·18)이는 일찌감치 미용을 배워 얼마전 미용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취업에 대해선 아직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 가있는 선배 언니가 겪은 어려움을 보면 심한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언니는 컴퓨터 등 각종 자격증을 여러개 갖고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취업대열에선 항상 자격증 하나없는 얼굴 예쁜 학생에게 밀려나기만 하던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얼굴에 자신이 없는 또 다른 학생 재희(가명·18)는 일반취업은 벌써 포기하고 여군하사관이 되려고 마음 먹고 있다. 그러나 그마저 얼굴이나 키에 밀릴까 걱정이 돼서 조리사 자격증을 따놓을까 생각중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외모는 단정할 것, 예쁘고 늘씬할 것' 등 기업들이 요구하는 조건에 자신들이 맞지 않다고 지레 짐작하고 있다. "이왕이면 예쁜 사람을 뽑지 않겠느냐"며 이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성형수술비를 벌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조숙자(전 포항여성회 대표)씨는 "기업들이 면접을 통해 학생들의 실무능력을 판단하기보다 외모를 중시하는 관행이 여전하다"며 "기업체와 학교측이 이같은 그릇된 풍조를 개선하는데 노력하지 않는 한 외모지상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들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높아지자 업계 일각에서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기업체들의 구인의뢰 공문에 '신체 건강하고 활동적인 여성'·'참신하고 성실한 학생' 등의 표현이 늘고 과거처럼 용모나 키·체중 등을 따로 명시하지 않는 것이 그런 움직임의 하나다. 남녀고용평등법이 발효된 이후 지난해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현상이다.
지난해 대구지역 일간지 및 정보지에서 모집 채용과 관련한 신문광고를 조사한 대구여성회 고용평등상담센터에 따르면 과거에 비해 '키 163cm 이상, 몸무게 50kg 이하 용모 단정한 여성' 등과 같은 노골적인 표현으로 외모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은 없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모 실업계 학교 취업보도부 담당 교사는 '일부 업체는 구인의뢰 공문과는 달리 전화 등 구두로 예쁜 여학생을 보내줄 것'을 따로 부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실업계 진로상담 교사는 "막상 학생을 추천할 때는 한명이라도 더 많은 학생을 취업시키기 위해서 회사 요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교사 입장에서 평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다독거리다 기업의 입사 기준이 차이가 날 때 학생들 보기 난감하고 자괴감마저 든다는 것이다.
경북대 직업능력개발센터 김기동 팀장은 "IMF 이후 기업체의 노동강도가 강해지면서 채용공고와는 달리 여학생들은 남녀 차별에다 외모 차별까지 감당해야 할 정도로 취업전선에 어려움이 많다"면서 "학생들은 외모 이전에 확고한 직업관을 갖고 충분한 실력을 쌓은 후 취업문을 두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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