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비바! 라이프-푸른사랑회

연말연시를 앞두고 사람들이 발길이 더욱 분주해지고, 이제 막 거리에 등장한 구세군의 자선냄비와 종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붙든다. 겨울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계절.

저소득층과 소년소녀가장, 노인 홀로 사는 가구는 힘겨운 겨울나기로 걱정이 앞선다. 그나마 이웃의 따뜻한 온정의 손길이 있어 추위도 잊고 살 수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각 가정마다 겨우살이 준비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바빠지는 요즘 대구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가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지난달 23일 달서구 E마트 월배점 주차장. 달서구 관내에 거주하는 주부들이 속속 모였다. '푸른사랑회'의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 날. 해마다 이맘때면 맛있는 김장을 담궈 영세민들과 독거노인 가구에 전달하는 이 봉사모임은 올해도 어김없이 팔을 걷어붙였다.

50여명의 회원들이 미리 준비한 1천500포기의 배추와 무에다 갖은 양념으로 저마다 솜씨를 뽐냈다. 당초 1천 포기를 예상했지만 냉해로 배추 속이 예년에 비하면 눈에 띄게 크기가 줄어 영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500포기를 더 만들었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회원들은 양념을 버무려 넣으며 마냥 즐겁다. 작은 정성이지만 이웃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고, 한달에 한두번 얼굴을 대하는 회원들을 건강하게 다시 볼 수 있어서 좋다.

배추와 무를 씻고 다듬는 손길이 바쁘지만 신명이 난다. 이날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에 참여한 회원들은 집에서 담그는 김장만큼이나 정성을 들였다.

배추와 무도 최상품으로 준비했고, 양념도 질 좋은 것만 골랐다. 김장 맛을 좌우하는 젓갈도 흔한 멸치젓보다는 김장 색깔이 곱고 맛도 시원한 액젓에다 참치액젓을 넣어 맛깔스런 김장을 만드는데 정성을 들였다.

푸른사랑회 안살림을 맡고 있는 사무국장 조복희씨는 행사계획 때만해도 경비 걱정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지만 올해는 한 숨을 돌렸다. 올해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에는 E마트 월배점(점장 최범용)이 힘을 보태 훨씬 도움이 많이 되었기 때문.

관내 기관에서 배추며 양념이며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20여명의 이마트 직원들도 처음으로 행사에 참여, 함께 일손을 거들어 한결 힘이 난다. 회원 성외선(달서구 신당동)씨는 "비록 작은 정성이지만 형편이 어려운 이웃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슴뿌듯함을 느낀다"며 "많은 시민들과 기관단체들이 참여하는 이웃돕기 행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해마다 연말이면 시내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행사가 열렸지만 올해는 대통령선거 등 정치일정이 코 앞에 두고 있어 다른 단체의 움직임이 크게 줄어들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렇게 정성을 담은 김장은 달서구청 사회복지과를 통해 달서구 관내 저소득 가정 220가구에 한 가정당 5~6㎏이 지급됐다. 한 가정이 겨우내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만 그나마 신선한 김장 김치를 식탁에서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김장을 전달받은 각 가정에서는 해마다 맛있는 김장을 빠뜨리지 않고 보내줘 반찬걱정을 크게 덜고 있다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를 잊지 않고 지켜봐주는 이웃이 있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무료급식소에도 사랑의 김장이 전달됐다. 올 여름 태풍 루사가 몰아쳐 큰 피해를 입은 김천지역 수재민에게도 500포기가 전달돼 올해 행사가 더 뜻이 깊었다. 지난 여름 푸른사랑회 이춘자 회장을 비롯 10여명의 회원들은 수해지역인 김천 지례면을 다녀왔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농촌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태려는 뜻에서 자원해 모래주머니를 나르고 길을 복구하는 등 비지땀을 흘렸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이번 김장담그기 행사 때는 컨테이너에서 겨울을 날 현지 주민들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그래서 뜻을 모아 500포기를 김천 수재민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푸른사랑회가 발족한 것은 지난 1996년. 달서구 관내 뜻있는 주부들 십여명이 모여 시작됐다. 상인3동 새마을부녀회 일을 오랫동안 해온 이춘자 회장을 비롯 평소 관내 봉사활동에 앞장서오며 함께 일해온 여성들이 적극 참여했다.

30대부터 50대 주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주부들이 집안 살림과 바깥일로 바쁘지만 이웃돕기에 팔을 걷었다. 70~80명의 회원들이 등록했고, 매달 한두차례 모여 이웃을 위한 봉사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두류공원 무료급식소를 개설하거나 대구시각장애인협회 지부를 방문, 장애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돕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는 올해로 7년째다. 연말이면 김장 김치를 먹고싶어도 먹지 못하는 어려운 주민들이 많은 현실에서 십시일반 회비를 걷어 김장재료를 마련하고 직접 손으로 담가 전달해오고 있다.

IMF때는 주변의 도움의 손길이 끊겨 애를 먹기도 했지만 꾸준히 이 행사를 마련해오고 있다. 이춘자(57) 회장은 "저소득층 주민들의 집을 한번씩 방문해 곤궁한 살림살이를 볼 때마다 눈물이 앞선다"며 "가진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이웃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을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푸른사랑회는 회원들이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도 여전히 각종 행사에 참여해 힘을 보태는 등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도움을 주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에게서 오히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배우기도 한다는 회원들은 작은 봉사에서 얻는 가슴벅참이 이 사회를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원동력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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