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무현 후보 대구 유세 주부 이경숙씨 참관기

7일 오후 4시 아직 어두울 시간도 아니건만 가끔씩 내리는 가랑비와 젖은 아스팔트 때문에 사방이 어둑해졌다. 무심하게 살다가 이렇게 토요일의 오후에 유세장을 찾는 마음이 조금은 무겁다.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으로 가득하던 서문시장, 홍보용 노래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찻길을 내어주며 차분하게 늘어서 있고, 자리를 미처 차지 못한 사람들은 시장의 주차장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아직 노무현 후보는 도착하지 않았고 노란 띠를 맨 선거 운동원이 단상에서 율동으로 눈길을 잡고 있다. '노란 손수건'이라는 소설을 소재로 한 팝송을 개사 한 노래가 들려나온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아 줘. 희망의 노란 리본을 달고…".약간의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포장마차 "계림"에서 오뎅을 먹었다. "오늘사람들이 많아 장사 잘 되시겠어요" "아이지요, 유세하는 날은 장사 더 못하지예, 누가 돼도 마찬가지라예.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묻지도 않는 말을 보탠다.

그사이 도착했나보다. 노무현 후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유세장 한 켠에서는 길을 내 달라는 상인들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그 말을 들었을까.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양해의 말을 먼저 건네는 노 후보의 목소리가 무겁다.

두 여중생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선진국이라는 허상과 자식하나 지키지 못하는 찢겨진 우리의 현실이 한없이 부끄럽다. 느릿한 말투와 무거운 분위기의 연설이 끝나고 지지 연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서…. 새 희망의 미래를" 구호가 스피커를 통해 쏟아진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대통령은 아니다. 단지 후보일 뿐. 상인들의 말처럼 우리들은 자조적인 좌절의 깊은 우울에서 아직 고민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선뜻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이 좌절의 깊은 우울을 후보들은 알기나 할까. 마지막까지 겸손히 국민들의 선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치유의 희망을 안고 소리 없이 내미는 한 표, 한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시 30분. 대구백화점 앞의 유세장은 서문시장보다는 훨씬 활기에 차 있다. 이미 신해철과, 명계남, 문성근 등의 연예인들이 분위기를 한층 달구어 놓았다. 동원된 청중은 물론 주말 쇼핑객들도 표정을 드러내는 법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참을 지났을까 오래 팔장만 끼고 있던 사람들이 짧은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긴장을 푼다."국민 여러분이 새로운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반응에 힘을 얻었는지 노 후보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다.

사람들은 노무현 후보를 직접 본 소감을 나누고 있었다. "생각보다 키가 작네" "실물이 좀 낫다" "젊잖아" "말하는 폼이 진실해 보이네" 간간이 평가를 내리지만 한결같이 인상 비평이다. 많은 논리에 지쳐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눈빛에서, 손짓에서, 목소리의 색깔에서 말속에 숨겨진 보다 정확한 냄새를 맡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기를 마치고 나서 대통령도 대통령의 아들도 감옥가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미심쩍은 의심의 눈초리를 의식했을까. 노 후보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망설이지 마십시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좀더 가까이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을 이어 보려는 의지가 보였다.

저녁 7시. 성서 홈플러스 앞. 유세장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노 후보는 연단도 없이 마이크를 들고 강연하듯 유세를 했다. 동전이 짤랑거리는 노란 돼지 저금통이 눈길을 끈다. "돼지 저금통으로 국민이 돈을 모아 주었으니 돈 준 사람 말을 듣겠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잠시 웃음을 터트린다.

유세를 마치고 악수를 하며 차를 타러 가는데 짧은 머리를 한 교복 입은 남학생이 밀리는 틈에서 핸드폰 카메라로 노무현 후보의 얼굴을 찍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보인다. 한 아저씨가 그 틈에 급히 지갑을 열어 만원을 꺼내고, 그 곁에서 누군가가 내민 구겨진 천원과 만원짜리를 노무현 후보의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의 수선함과 북새통 속에서 노 후보는 떠났다.

이경숙(39.대구시 수성구 범어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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