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이거나, 하나 둘 켜지는 저녁 도시 불빛이 그 여자들의 어깨 둘레로 보일 때, 붉게 물든 저녁놀 부드럽게 산정에 입맞출 때, 난 으레히 습관처럼 지녀온 버릇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펼쳐보는 일이다.... 어차피 인생은 제 스스로 힘껏 움직이다 가는 것. 저 창 밖 빈 겨울 나무처럼, 추운 모퉁이 한켠에 비켜 서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푸른 잎사귀의 물관을 타고 올라서,

-김동원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

◈미국 시인 R 푸르스트의 '눈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벌써 눈내리는 계절이다. 그저께 팔공산의 산 이마가 하얗게 초설(初雪)에 덮이기도 했다.

눈 내리는 날 시를 펼쳐 읽는 마음, 옛 성현의 말씀에도 시를 읽지 않으면 할 말이 없다고 했다(不學詩 無以言-論語). 그 마음이 되어야 봄이 오면 제일 먼저 푸른 잎사귀 물관을 타고 하늘에 오를 수 있으리라.

김용락〈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