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大選)을 사흘 남겨 놓고 어제 벌어진 마지막 TV합동토론은 한 마디로 토론이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움직이는 부동표가 많아 이 토론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측하였지만, 우리의 기대는 토론이 진행되면서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토론자가 옆에 있음에도"여러분"이라고 말을 꺼내는 어투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정책과 비전을 검증하는 토론이기보다는 국민을 대상으로 자신들을 알리는 연출된 전시장이었기때문이었다.
공약의 방향과 현실성을 꼼꼼히 따져보기 위해 마련된 질문과 답변, 반론과 재반론은 토론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형식적으로 제기된 질문에 틀에 박힌 답변이 주어진다면 토론은 결코 내실 있게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토론이 단순한 전시장으로 변질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미디어 정치'가 눈에 띈다.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허용하는 문자매체와는 달리 현장성에 초점을 맞춘 영상매체는 시청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미디어 정치가 후보자들의 '메시지'보다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때문인지 후보자들은 자신이 제시하는 정책과 비전을 통해 특정한 이미지를 강조하려고 노력할 뿐 상대방의 공약을철저하게 검증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후보는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과격함을 중도의 온건한 이미지로 감추려고 노력한 반면, 이회창후보는 엘리트의 날카로움보다는 서민적 친화력을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후보자들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움'이 강조된 것만큼이나 사회·문화 분야에 관한 공약 역시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저와 다른 후보의 말을 들으면 공약의 차이가 없지요"라는 말이나 "그런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라는 말이 후보자들 사이에 오갈 정도로 복지분야에관한 공약들은 장밋빛으로 일관되었다.
근본적으로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추구하는 권영길 후보를 제외하면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국가가 교육과 육아를 단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정책에서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사회복지에 들어가는 엄청난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사회복지의 기본방향을국가관리체제로 할 것인지, 선진국들이 당면하고 있는 국가재정적자를 어떻게 피해갈 것인지 등의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사회의 난제를 들춰내지 않고 장밋빛으로만 채색한다면, 공약은 공통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문제와 관련하여 제시된 지방대학 육성책은 대표적인 예이다. 여러 특성화 대학을 만들어 산학연 발전토대를 이루겠다는 이회창 후보의 공약이나 지방대를 분야별로 집중 육성하겠다는 노무현 후보의 공약은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실현방법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제시된 공약이 선심성이라는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공약의 내용이 차별화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정책과 비전'보다는 '인물과 능력'을 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쩌면 후보자의 '당'보다는'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미디어 정치의 필연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지막 토론은 정책의 '내용'을 검증하지는 못하였지만 정책을 집행할 후보들의 '성격'은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
세 후보는 특히 언론관, 교육개혁에 관한 입장, 수도이전 공약에 대한 평가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세 후보는 언론사도 법에 의한 세무조사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원론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법이 형평성을 잃을 경우 언론조사가 언론탄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반면 노무현 후보는 언론자유가 보호되어야 하지만 특권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편 이 법과 원칙을 강조하였다면, 다른 한편은 이 보다는 권력의 불평등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준 것이다.
이런 차이는 고교평준화 문제에 관해서도 이어진다. 이회창 후보는 "상향평준화"라는 정책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경쟁력을 통한 평준화의 보완을 강조하였다면,노무현 후보는 "학벌주의 타파"를 강조함으로써 평준화 유지를 선호하였다.
한편은 자율화를, 그리고 다른 한편은 평등을 우선적 가치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논란을 빚은 수도 이전은 그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없다면 결국 두 후보의 성격만 드러낼 뿐이다. 노무현 후보는 수도권 과밀로 인한 모든 문제를수도이전으로 단숨에 해결하려 한다면, 이회창 후보는 교통은 교통문제로 인구는 인구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점진적 방법을 선호한다.
세 측면에서 드러난 두 후보의 차이점은 결국 '안정 대 진보', '진보 대 개혁'으로 특징지어진다. 공약에 별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이제 감성이아닌 이성으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부패를 청산할 안정을 바라는가? 아니면, 우리는 기득권을 개혁할 진보를 바라는가? 이제는 유권자들이 대답할 차례이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