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창석칼럼-촛불과 핵폭탄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불의 역사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은 강력한 에너지를 개발하고 적절히 사용하는 데에 끊임없이 골몰해왔다.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개발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적 환경을 확장할 수 있는 최대의 화두일 것이다.

누군가 감히 불붙은 나뭇가지를 거머진 최초의 순간부터 인간은 에너지의 역사에 뛰어들었다. 불을 든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지킬 수 있었으며,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모닥불을 피웠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인간은 최초의 농축 연료를 개발했으니, 그것이 촛불이다. 최초로 불을 안전하게 초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불꽃을 바라보던 시기까지 인간은 불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불을 연소(燃素)라는 물질적 원소로 생각했다. 근대에 이르러 불은 물질이 산소와 화합하여 표출시키는 열과 빛의 작용임을 알면서 비로소 연소(燃燒)라 불리게 되었다.

초에서부터 새로운 연료를 찾는 데는 그리 긴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인간은 불꽃이 연료에 내장된 에너지의 표출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수많은 종류의 보다 강력하고 순간적인 에너지를 개발했다. 석유와 휘발유, 화약과 전기, 급기야 원자의 기하급수적 분열에 의한 원자력과 핵폭탄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강력한 에너지를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에너지 앞에 서 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핵폭발의 위협 앞에서 인간의 종식을 염려하는 실존에 서 있다.

보다 강력한 불이나 에너지가 나왔다고 해서 옛것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오늘의 사오십대는 이 모든 에너지의 발전을 몸으로 살아왔다. 우리 어린 시절의 시골에는 보일러도 전기도 없었다. 겨울에는 모닥불에 손을 쬐고, 군불로 방을 데웠다.

밤이면 초롱불이나 촛불을 밝히고 꿈같은 전기의 원리가 적혀 있는 책을 읽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야간 잔치가 벌어졌다. 모두들 대낮같은 밤을 즐기며, 어쩌면 이렇게 대낮같이 밝으냐고 소리소리 지르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집집마다 비싼 전기세를 감당하지 못하여, 각 방의 전등을 하나씩 줄였다. 즉 방과 방 사이의 벽을 뚫고, 긴 형광등을 벽 중간에 달기도 했다. 그래서 한 쪽 방에서는 불끄고 자자 그러고, 다른 방에서는 책본다고 켜라 그러고. 아마도 촛불과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꿈꾸고 공부하던 아이들이 그나마 국제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강력한 핵연료가 개발되었다고 해서 지난 날의 연료가 사라진 것도 아니요, 쓸모가 없어진 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번에 남한과 북한은 동시에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할 말이 생겼다. 여기서 남한은 손에 촛불을 들었고, 북한은 핵 카드를 선택했다.

물론 촛불은 현실적으로 미약하나마, 마음을 모으게 하는 데는 강하다. 핵폭탄은 실전에 강력하나마,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약하다. 결국 촛불은 조그만 대답이긴 하지만 세계인의 마음과 부시 대통령의 심심한 사과를 이끌어 내었다. 핵 카드에 대한 대답은 아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다.

불이나 에너지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에너지는 수많은 사물의 다양한 변화 방식이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무조건 강력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어디에 어떤 에너지가 강한 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촛불 앞에서는 숙연해지고 진심으로 되돌아오는가 보다.

어쩌면 빛과 열을 발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태우는 촛불의 과정이 인간의 운명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바람 앞에 촛불은 약하지만, 영혼 앞에서는 핵폭탄보다도 강했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전쟁이라면, 이번에 남한의 시민은 강력한 무기를 들었고, 북한의 지도부는 약한 무기를 든 것이 아닐까?

대구가톨릭대교수·철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