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기중기에 매달린 오랜 도시가 있다.

들오리떼 사라진 아득한 하늘 위를

내장의 녹슨 파이프 드러내고

대칭 어긋난 톱니자국 남기고 있다.

커피 포트 속엔 언제나 잃어버린 의치(義齒)가 있다.

엑스포엔 언제나 복제된 백조가 있다.

밀납으로 된 소녀들이 하얗게 웃고 있는

빈 교실이 있다.

분리되지 못한 검은 탯줄의

일기장이 있다 정치가 있다.

시의 필터도 걸러내지 못한

무거운 역사가 있다.

노동이 있다.

-권기호 'P. 네루다를 위하여'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출신 시인이다. 스페인 내란을 겪으면서 민중적 혁명적인 시를 썼다. 칠레 공산당 후보로 상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고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도 있다.

그 시인에게 바치는 헌시로 한국 시인이 시를 쓴 것이다. 들오리떼가 사라진 기중기에 매달린 낡은 도시, 분리되지 못한 검은 탯줄의 정치와 역사, 노동이 있는 도시. 그 어둡고 무거운 도시가 바로 오늘 우리 현실인 것을 이 시는 주장하고 있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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