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TV 드라마 '야인시대'는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청.장년층도 즐겨보는 프로다. 이 드라마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한 몫을 하지만 당시 주먹들의 의리와 맞장을 뜬 후 취하는 패자의 깨끗한 승복 태도도 중요한 요인이다.
김두한을 위시한 우리나라 주먹들은 물론 일본 어깨들조차도 비겁한 행위는 금기시했다. 드라마이긴 하지만 조선에 진출해 주먹계와 상권을 동시 석권하려던 하야시는 자신의 강력한 견제세력인 조선 대표 주먹 김두한을 꺾어버릴 기회가 있었는데도 오히려 간계를 써서 김두한을 유인해 '뒤통수를 치던' 부하를 질책, 그가 할복케 했다.
이후 패배를 인정했고 패자의 도리를 다했다. 다른 주먹패들도 승부는 냉혹하게 겨루었지만 인정할 것은 깨끗하게 인정했다. 구마적.신마적이 그랬고, 그보다 먼저 쌍칼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떠나갔다.
시청자들은 인정과 의리와 승복이 메말라버린 세상에 살면서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이들의 남자다운 행위에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덩달아 드라마 인기가 올라갔다. 장황하게 드라마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 정치판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정권쟁취를 위해 전혀 이질적인 사람들이 합쳤다가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돌아서버리는 것이 한국정치풍토다. 이합집산과 배신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자민련 이인제 총재권한대행은 한 때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었다. 당찬 이미지와 지도력, 능숙한 말솜씨가 어우러진 그를 국민들은 좋아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경선불복한데 이어 민주당에서조차 또 자리를 옮겨 그를 지지하던 국민 상당수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어느 당에서건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승자의 손을 들어줬다면 오늘날 그를 보는 시선이 사뭇 다를 것이라고 보는 국민이 많다.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두어시간 앞두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의 공조파기를 선언했다. 공조파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국민들은 또하나의 신의를 저버린 행위를 보는 듯하여 혼란스럽기만 하다.
처음부터 맞지않는 사람끼리 합쳤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선거를 목전에 두고 갈라서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 또하나의 정치적 배신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공조를 시작할 때 상대측을 좀 더 깊이 연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속 정당이 다르기 때문에 변절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역시 '한국 정치판은 이렇구나'하는 자괴감이 든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앨 고어 전 부통령의 대통령 불출마 선언은 미국과 우리의 국력 차이가 왜 이 정도인가를 느끼게 해준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54만표를 더 얻고도 선거인단 확보에서 뒤져 백악관 주인 자리를 놓쳤다. 법정 투쟁을 벌이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당리보다는 애국심이 앞선다"며 거절하고 깨끗하게 물러났다.
그는 여전히 차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했지만 이번에 "미국은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데 부시 대통령과 다시 맞붙으면 과거로 돌아간다"며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제 54세 불과한 그가 대권 의욕을 버리기 쉽지 않았겠지만 자신보다 국가의 미래를 선택했다.깨끗한 승복과 아름다운 퇴장이 우리나라에서는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최정암(사회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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