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2002년이었다. 꿈만 같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냈고, 21세기 첫 대통령을 뽑는 선거도 끝났다. 그러나 경북도민들에게는 혹독한 자연재해와 거대한 농산물 수입개방의 물결이라는 시련이 닥친 해였다. 또 구조적인 농산물 납품비리가 드러나 농민들을 분노케 했다. 4회에 걸쳐 경북의 한 해를 돌아본다. 편집자
8월의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다.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태풍 '루사'의 빗줄기는 심상치 않았다. 소백산맥을 넘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듯 태풍은 거대한 물줄기를 경북에 쏟아부었다.
시간당 70㎜를 넘나드는 집중호우는 계곡을 쓸어내리며 물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전봇대는 뚝뚝 부러졌고, 아스팔트는 스티로폼마냥 조각조각 부서져 물속에 잠겼다. 곳곳의 마을과 논밭, 도로가 흔적조차 없어졌다.
이튿날 오후, 면사무소로 긴급 대피했던 주민들이 사라진 길을 더듬으며 반나절을 걸어 마을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행여나 하는 기대감마저 무너졌다. 돌아갈 집은커녕 한여름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렸던 논과 밭도 온통 자갈더미에 묻혔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하는 가족들이 태풍 속에 사라졌다.
태풍 루사는 경북지역에서 3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3천699채의 집의 부서지거나 아예 없어졌고, 1만95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2만2천㏊의 농경지가 침수·낙과 피해를 입었고, 1만6천100가구의 전기공급과 4천387가구의 상수도 공급이 끊겼다. 재산피해는 김천 4천142억원 등 무려 8천658억원. 경북도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였다.
하루동안 경북도 전역에 내린 비는 김천 297㎜(대덕면 358㎜) 등 평균 118.8㎜. 태풍이 도착하기 보름 전쯤 경북도에는 열흘간 무려 425㎜의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이때도 700억원에 이르는 재산피해를 입었다. 지난해 혹독한 가뭄에 대한 앙갚음을 하려는 듯 8월 한달 집중호우와 태풍은 연평균 강수량의 절반을 쏟아붓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번 태풍으로 경북민들은 자원봉사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됐다. 태풍이 떠난 뒤 일주일만에 공무원과 군인·경찰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서 찾아든 복구인력은 연인원으로 무려 62만9천명에 이르렀다. 루사 습격 이후 약 4개월이 흘렀다.
아직도 복구작업은 진행되고 있고, 수십가구의 이재민들은 올겨울을 컨테이너 박스에서 지내야 한다. 경북도는 늦어도 내년 봄까지 항구복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그러나 제2, 제3의 루사가 닥쳐왔을 때 올해와 같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복구작업에 나섰던 한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인위적으로 물길을 바꾼 곳에는 어김없이 큰 피해가 났습니다. 자연을 거스른 대가를 치른 걸까요?"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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