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구임대 아파트의 소녀가장

장애 때문에 벌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동네, 몸이 아파 오히려 돈을 계속 더 꾸어다 넣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을, 텅 빈 주머니만 남은 사람들…. 그래서 영구임대 아파트는 '도시의 섬'이라 불린다.

공부시킬 힘이 없으니 자녀들까지도 다시 어려움의 바퀴를 돌기 십상이다. 빈곤의 재생산. 두 가정이 이 영구임대에서 10년 가까이 살고 있다.

◇희망을 만들고 싶은 다은이= 다른 고3생들은 대학 진학 문제로 바쁜 철이지만 대구 산격주공 영구임대의 여고 졸업반 다은이는 지금부터 얼마나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을 지에 더 마음을 쓰고 있다. 대학 등록금을 제 손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

다은이는 뼈가 굳어가는 강직성 척추염을 앓는 아버지, 초교 5년생인 남동생과 셋이서 산다. 이발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래서 초교 3학년 때부터 다은이는 엄마 역할까지 도맡았다. 청소.빨래.식사준비는 물론이고 세살짜리 동생까지 돌봐야 했다. 공부도 해야하니 어린 다은이는 항상 파김치였다. 영구임대 생활은 초교 4학년 때부터.

그러다보니 다은이는 철든 후 하루도 돈 걱정을 면한 날이 없었다. 관리비.임대료 내고 나면 가족에게 남는 돈은 한달에 고작 10여만원. 그것도 최근 기초생활보장법이 시행되고 난 이후 얘기다. 중학교 다닐 때는 쌀 떨어지는 날이 헤아릴 수 없었다. 먹을 것조차 없으니 동생을 '고아원'에 보낼 뻔한 위기도 여러번 넘겨야 했다.

다은이는 반드시 대학에 진학해 자신의 힘으로 가난의 굴레를 끊고 싶어 한다. "저는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께서 학원도 보내주시고 아는 대학생 언니까지 소개해 과외지도도 해주셨습니다. 대학을 못간다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집니다. 영구임대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해 대학 가고 가난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300만원이나 될 대학 등록금은 너무 무거운 짐이다. 다은이는 수능시험을 끝내자마자 할인점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시간당 2천500원. 이달 들어서는 같은 임금을 주는 주유소에도 나가 기름을 넣는다. 종일 일해 손에 쥐는 돈은 1만5천원 정도. 다음달까지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가난에 익숙해진 다은이도 요즘은 자꾸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쩔 수 없어 하고 있다. 053)381-9193(산격복지관).

◇힘든 모녀= 황금주공 영구임대 아파트의 최정숙(38.여)씨는 초교 6년생인 딸 주영이(가명)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엄마는 늘 아프기만 하고 아빠는 평생 앓기만 하다 돌아가셨다. 한달에 50만원씩 나오는 국가 보조금이 유일한 수입이지만 자신의 치료비에 대고 나면 반찬값 남기기도 힘들다. 폐질환이 심해 의료비만 월평균 20만원 들고 산소호흡기를 쓰느라 전기료만 월 13만원 나간다. 관리비가 또 10여만원. 오랜 병치레로 빚도 1천200만원이 넘는다.

내년에 중학교를 가야하는 주영이에게 돌아갈 수 있는 돈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중학교는커녕 주영이는 벌써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학교 숙제를 컴퓨터로 하고 프린터로 뽑아 내야 하지만 PC방에 보낼 비용조차 제대로 대기 힘들기 때문이다. 피아노 얘기를 하며 친구들이 부럽다고 했을 때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죽여 울어야 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에도 몇번씩 혼잣말로 하는 "미안하다"는 얘기뿐.

어서 건강을 회복해야 뭣이든 해 볼 수 있을 터이지만, 의사는 얼마 전 폐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해 왔다. 최씨에게 따라다니는 병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만성 폐쇄성 폐질환, 고혈압, 폐결핵 후유증, 만성 불면증….

"선생님이 되겠다는 아이입니다. 가난의 상징이라는 영구임대 아파트에서도 반듯한 선생님이 나올 수 있도록 키워보겠습니다. 그러자면 주영이가 시집갈 때까지는 어떻게든 돌봐줘야 할텐데, 제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저 어린 아이가 어떻게 될 지…". 최씨는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참았지만 눈물은 어쩌지 못했다. 053)768-1252(황금복지관).

최경철기자 ko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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