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외국어 학습지 회사원 이영은(28.여)씨에게 2002년은 가장 가슴 벅찬 한 해였다. 붉은 악마가 아니었고 여중생 사건 대책위원이 아니었으며 정치개혁을 앞장 서 부르짖는 운동가도 아니었지만, 그 흐름을 꿰뚫은 젊은 힘의 현장에 줄곧 서 왔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월드컵 대회가 한창일 때는 '청소년 군단'을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자신이 교사로 봉사하는 '느티나무 배움터' 중고생 수십명이 그의 부대원. 범어네거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동성로 등을 돌며 열성적인 응원을 펼쳤다.
'인터넷에 몇시 어디로 모이자'는 등의 글이 오르면 아이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 거리에서 젊은이들은 열정적이면서도 질서있는 응원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세계가 감탄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 먼저 놀랐습니다. 이를 통해 얻은 '우리는 하나'라는 믿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현실에 냉소적이던 젊은이들을 변화시킨 것 같습니다. 월드컵 대회는 우리 사회사에 획을 그어준 시발점이었습니다".
월드컵 흥분의 와중에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이 인터넷을 통해 젊은이들을 뒤흔들었다. 시민들은 미군 재판 이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지만, 이씨는 6월에 벌써 다시 거리로 나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비참한 죽음을 알려야겠다며 또한번 자신의 청소년군단과 함께 동성로.두류공원을 찾아 시민들에게 관련 사진을 보여주고 서명을 받았다. 이윽고 대구에도 여중생 사망사건 대책위가 꾸려진 후에는 등하교길 홍보물 배포와 서명 받기 등으로 쉴 날이 없었고, 11월 촛불시위가 시작된 뒤에는 주말마다 매달렸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 선거 운동이 시작되자 젊은 파워들은 뭉치고 축적한 힘을 드디어 '정치개혁' '사회개혁' 요구로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이씨는 가족회의를 통해 한번도 투표한 적 없는 동생에게 젊은이가 나서야 할 때임을 설득하고 친구들과도 투표 참여 운동을 벌였다.
"우리 역사가 여기까지 오는 데 50년 걸렸습니다. 이제 젊은이들도 무거운 책임을 나눠지겠다고 나섰습니다. 저 역시 '정치를 움직이고 역사를 새로 쓰는 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앞으로는 현실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감시자가 될 겁니다". 이씨는 사회의 주변에서 세상의 핵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2002년 한국 젊은이의 전형 같아 보였다.
이호준기자 hop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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