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명작가 콩트 릴레이-7번 국도 장달수씨

강원도를 남북으로 꿰고 있는 7번 국도는, 바닷가의 정취와 맛을 실컷 즐길 수 있는 여행 코스로 소문나 있다.

이 국도의 정감에 일찌감치 취한 여행자들은 경주의 동쪽에 있는 감포 항구를 출발기점으로 삼아 강원도 설악산까지 사뭇 동해를 끼고 달려가기를 즐긴다.

그래서 양양군의 낙산사 근처나 설악산 기슭에 있는 처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북쪽인 통일전망대까지 내쳐 달려가거나, 미시령이나 한계령을 너머 서울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 국도는 요즘 들어 매우 쾌적하고 반듯하게 정돈되어 동해의 해수욕장들과 태백산 기슭의 풍광을 즐기며 질주하기에는 한 몫을 하는 도로다.

그러나 오징어나 가자미를 잡는 근해어업으로 애옥살이를 견디고 있는 어촌 사람들의 애환을 속속들이 체험하거나 관찰 할 수 있는 도로로써의 명분은 점차 잃어가고 있는 셈이다.

7번 국도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외양의 횟집들, 명상을 가슴에 넣고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요지에만 세워진 은밀한 카페들, 그리고 숙박업소들의 행렬에 진력이 날 수도 있고, 분명히 관광객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풍광을 즐기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듯 오직 과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승용차들의 볼썽사나움이 금방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그런데 7번 국도와 거의 평행으로 북쪽으로 오르는 도로는 또 하나 있다.

지도를 좀더 세심하게 판독하노라면, 7번 국도 오른 편에 시늉으로만 그려져 있는 왕복 2차선의 협소한 옛 지방도로들을 발견 할 수 있다.

틈틈이 왼편의 7번 국도와 만나는 접속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도로로 들어서면, 승용차 안에 앉아서도 파도 소리를 명료하게 들을 수 있을 만큼 동해와 운명적으로 밀착되어 있다.

추녀들의 기울기가 이제 곧장 바다 속으로 곤두박일 것 같은 낡은 주택들 역시 파도가 방구들 밑으로 들락날락할 것처럼 바다와 가깝다.

시간도 걸리고, 속도감도 없고, 길을 올곧게 찾아내기도 수월하지 않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지도를 소상하게 읽어가며 살펴가다 보면, 지방도로 산기슭 주변에 둥지를 틀고 동해에 두 다리를 담고 연명하고 있는 어촌 사람들의 진면목과 만날 수 있다.

내가 장 달수 씨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지방 도로를 찾아 나선 여행길에서 였다.

강원도 경계선 안 쪽으로 진입하여 한 시간 정도 북쪽으로 오르던 중에 작은 어촌을 만났고, 때를 같이해서 화장실을 찾아야할 볼일이 생겼다.

손쉽게 화장실을 찾아내어 더부룩했던 아랫배를 속시원하게 해결하고, 낡은 판자로 칸살을 막아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길가의 구멍가게로 무심히 시선을 주고 있었다.

오후 3시 경, 파도소리도 한결 거칠어졌고, 불어오는 바람도 무척 차가웠다.

그런데 그 가게 문 앞에 입성이 매우 초라한 두 노인이 나란하게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아침나절부터 이미 소주 몇 잔을 마신 듯 얼굴들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눈대중으로 얼른 집어 보아서 가게 뒤편의 마을에는 스무 채쯤의 가옥들이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나, 골목 어귀 어디를 살펴보아도 도무지 인기척이 없었다.

덕장에 매달린 몇 마리의 오징어들이 바람에 금방 날아갈 듯 까불고 있을 뿐이었다.

그처럼 황량한 마을에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두 노인은, 이 마을에도 명색 사람은 살고 있다는 것을 항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발걸음이 옮겨졌고, 상투적이고 어정쩡한 인사말을 건넸다.

한 마을에 오래 몸 붙이고 살고 있는 노인들은, 여행자들에게 배타적이다.

그런데 두 노인은 그렇지 않았다.

흡사 내가 인사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부터가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들 두 노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장 달수 씨였다.

우리 셋은 소주 한 병을 비닐 장판을 입힌 살평상 위에 올려놓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엄청 말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나이 일흔 다섯인 장 달수 씨는 한 술 더 떠서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집에서 아침 끼니만 얼추 때우고 나면, 구멍가게 앞에서 만나 하루 종일 해바라기를 하며 소일하는 형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침 인사말도 싱거울 정도로 십 수년을 두고 한결같이 만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나눌 대화도 없었다.

그래서 가게 앞에 나와 앉아 혹시나 수작을 건네주는 어수룩한 여행자라도 만날까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을에는 물론 주민들이 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두 노인들의 인생 편력 따위는 오랜 세월을 두고 신물나게 들어왔기 때문에 철부지들까지도 좔좔 외울 정도다.

그래서 이미 옛날에 신선도를 잃어버린 똑 같은 얘기를 다소곳하게 들어줄 상대가 없을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강원도 사투리의 특징중의 한가지는 대화의 마감을 곧잘 "하드래요"로 끝내기 때문에 몇 시간을 두고 하소연이나 넋두리를 늘어놓더라도 모두 듣고 나면, 흡사 남의 말을 대신해 주었던 것처럼 현실감이 반감되는 일탈성이 있다.

그런 강원도 사투리의 화법을 구사하기는 장 달수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화법이 갖는 모호성을 장 달수 씨는 깨닫고 있는지 몰랐다.

살갗을 베어갈 듯한 혹한 속에서도 그가 윗도리와 내복까지 마다 않고 거침없이 벗어 부치고 알몸의 상반신을 보여 준 것은 수술한 흉터 자리를 내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육이오 전쟁 중에 그는 입대했고, 짧은 훈련기간을 끝내고 미군부대에 배속되었다.

미군에 배속되어 전선으로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실탄 몇 발이 배를 관통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수술을 마친 이후 칠순을 넘긴 지금까지 튼튼한 생명을 유지시켜 온 것이었다.

운 좋게도 마침 미군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선 비교적 진보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내 창자 몇 군데는 푸라스틱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더래요".

"푸라스틱으로요?"

"그렇 드래요".

대뜸 동의를 해 준 사람은 장 달수 씨 곁에 있던 노인이었다.

"그 피부이씨 파이프를 창자에 달고 지금까지 탈없이 살아 왔었습니까?"

"거짓말 아니드래요. 미군에 배속되지 않았으면, 난 곱다시 죽었을 목숨이래요".

장 달수 씨는 쭈글쭈글한 뱃구레에 자리잡은 흉터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제대하고 나서 20년 동안 멸치 배 선장까지 했드래요".

"그것 참, 신기해서 뱃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네요. 지금까지 전혀 후유증 없이 살고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후유증이 있었으면, 칠십이 넘도록 살수 있었드래요?"

"그랬겠지요. 지금까지 소화도 잘되십니까?"

"못 먹어서 탈이지. 먹어서 탈 본 일은 없었드래요".

내가 자못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전쟁체험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장 달수 씨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제의를 했다.

여행길이 크게 쫓기지 않다면, 자기 집으로 가서 하룻밤 묵고 가라는 것이었다.

공짜로 재워 주고 끼니까지 대접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몇 십 년 동안 늙은이 두 사람이 집을 지키고 살고 있는데, 하루 종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 대화거리가 없어 입에서 구린내가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

간혹 태풍이라도 불면, 그나마 이웃을 거들어줄 일거리라도 있어 좋은데, 태풍도 없는 스산한 바다를 하루 종일 바라보며 살자니 늙은이라 하더라도 근질근질하고 좀이 쑤셔 도무지 낙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제안을 두고 망설였다.

밤새 칭얼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어가며 일생 동안 숱한 질곡을 견뎌낸 늙은이의 얘기를 듣고, 거기다가 피대기(덜 마른 오징어) 소주잔까지 곁들인 구도를 상상하면, 회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취를 냉큼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눈치를 알아챈 장 달수 씨는 언덕 기슭에 자리 잡은 자신의 집을 손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고맙습니다만, 여행 일정 때문에……"

"밥 값 내놓으라는 소리 안 할 것이래요".

"그 때문이 아니라, 만날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만날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면, 가 봐야지요".

어쩌나 보려고 툭 던져 본 제안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데, 단념도 또한 빨랐다.

그런데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태도에 나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가 이젠 잊혀지기를 바라고 있는 지금까지 그 전쟁을 뱃속에 담은 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쩐 셈인지 그 날은 신기해 보였다.

낯선 여행자라 하더라도, 지금껏 자신과 어울려 살고 있는 50년 전의 전쟁을 아픈 가슴으로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는 장 달수 씨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떠날 수 없었다.

그 날 밤 나는, 그 노인네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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