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양 주실마을-"80년 넘게 양력설 쇄요"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는 2003년 1월 1일에도 아침부터 이 마을 곳곳에서 조상께 차례상으로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고 어른들께 세배하는 설 분위기로 분주했다.

한양 조씨 병참공파 후손들이 370여년을 집성촌을 이뤄 살아가는 이곳은 80년을 넘게 양력설을 쇠고 있다.

온 마을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윷놀이며 모둠살이를 하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었지만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후손들은 정성스레 마련한 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리고 이웃간의 덕담과 미처 찾아오지 못한 후손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고향을 떠나 직장에 다니는 조운호(31)씨는 "정부에서 신정연휴를 없애고 하루만 휴일로 정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하지만 80년을 넘게 지내 온 양력설 문화에서 후손들에게 일찌감치 개화와 신문화를 접하게 하려했던 조상님들의 지혜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이 마을 60, 70대 후손들이 중심이 돼 한국전쟁 이후 끊어졌던 팔목놀이, 화가투놀이, 주사위놀이, 내방가사 읊기 등 주실마을의 전통놀이를 기억을 더듬어 재연하는 '민속놀이 대축제'를 마련해 양력설 문화를 새롭게 다지기도 했다.

이 마을은 1629년(인조 7년) 호은공 조전이 입향해 터를 닦았으며 이후 1894년까지 265년간 이 마을에서 62명의 선비들이 대소과에 급제하고 수많은 문집을 남기는 등 문향의 반석을 다지기도 했다.

특히 이 마을은 관례와 혼례의 통합 등 생활개혁을 추진하고 월록서당 등 교육기관을 세워 후손들에게 일찌감치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또한 구 한말 의병운동과 개화개혁운동, 해외 신학촌 건설 등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물들도 숱하게 배출됐으며 마을 안에 배영학당·동진학교 등 노동야학과 여성야학을 세워 민족교육에 앞서기도 했다.

민족시인 청록파 지훈 조동탁과 그의 형 세림 조동진 시인의 아버지였던 조헌영선생은 신간회 중앙회 검사위원을 맡아 활동하면서 양력과세로 마을 설 문화를 개혁해 지금까지 80년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마을 주민 조동걸씨는 "양력설을 쇠는 것은 서울이나 해외로 유학하던 자식들을 위한 조치였다"며 "이들이 방학을 맞아 고향을 모두 찾았을 때 함께 설을 보내기 위해 양력설로 바꾼 것으로 개화에 일찍이 눈을 뜬 것"이라 했다.

영양·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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