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 2003-농수산물 도매시장

새해 첫 일요일에도 생업전선은 여전히 분주했다.

지난 5일 새벽 5시30분. 뚝 떨어진 기온과 세찬 바람이 아침운동을 하려고 집을 나섰던 사람들을 모두 방 아랫목으로 다시 몰아넣은 듯 거리에는 사람은 물론 달리는 차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구시 북구 매천동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 안쪽은 달랐다.

여기저기서 쇠드럼통 난로에 담긴 장작의 벌건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상인들이 두툼한 방한복으로 무장하고 하루를 준비하는 바쁜 몸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88년 매천동 도매시장이 생긴 이래 계속 무·배추만을 취급해왔다는 박모(61·대구시 북구 원대3가)씨는 이날 새벽 1시쯤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기자가 말을 붙일 겨를도 없이 채소를 나르고 분류하는 작업에 열중할 뿐이었다.

너무 춥다보니 몸을 움직이는 것 외에는 모든게 귀찮게 여겨질 만했다.

박씨와 같이 배추를 손질하던 5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 몸을 녹이기 위해 난로가로 다가서며 "어제 오후 대충 덮어둔 배추가 얼까봐 걱정이다"면서 다른 날보다 일찍 나와 간수를 해보지만 아무래도 동해가 생길 것 같다며 푸념을 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것은 작업에 지장이 있을 뿐이라는 듯 상인들은 이웃끼리도 거의 말을 나누는 법 없이 새벽의 정적 속에 매일 해오던 대로 익숙하게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들이 없었다.

다만 장작타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시장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오전 7시가 돼서야 첫 손님을 맞았다.

중간 크기의 배추 2포기가 묶여진 20단이 1단에 3천500원에 거래됐다.

하지만 박씨는 동료 상인에게 같은 물건을 1천500~1천600원에 넘겼다.

그 상인이 확보해 둔 배추가 얼어서 팔 수 없을 정도가 됐기 때문이란다.

일요일 엽채류 경매가 시작되는 오전 10시가 다가오자 한 도매법인 무·배추 경매장에는 적재함을 가득 채운 화물차가 속속 도착했다.

눈이 많이 내린 곳에서 출발한 듯 화물차 바퀴 주위에는 눈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한 중도매인은 배추를 실은 트럭 한 대가 들어오자 "이제 우리 물건이 왔다"고 말했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엽채류의 경우 대부분 '주인'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단골거래를 생산자든 도매인 상인이든 서로 인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경매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멈추자 경매사들 특유의 '굴러가는' 멘트가 시작됐다.

날씨가 추워 내일 반입물량은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트럭 20여대 분량의 경매는 15분만에 싱겁게 끝났다.

경매에는 중도매인들 손에 응찰기도 들려지지 않았고, 경매사가 임의대로 한 중도매인이 제시한 가격보다 단가를 올려버리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중도매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랜 관행처럼 모든 절차가 아주 쉽고 빠르게 끝났다.

무·배추를 실은 트럭들이 중도매인에게 인도되면 하차 작업이 시작된다.

주로 40, 50대 아주머니들이 작업에 나서는 4.5t 트럭 1대 분량 하차비는 배추는 6만원, 무는 7만원이다.

보통 4.5t 1대 하차에는 보통 2, 3명이 동원된다.

3명이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양은 연장작업을 하지 않으면 2대를 넘지 못한다.

박씨 가게 맞은편에서는 예순을 넘긴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 4명이 양파를 분류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석유난로가 가운데에 놓여있었지만 맹추위에 비해 너무 작아보였다.

도매시장 인근에 살고있는 정춘연(60·여)씨는 오전 6시에 나와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12시간하고 3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했다.

오전 경매와 물량 출입이 분주히 이루어지고 있는 사이 어느새 장작불도 사그라들고 덩달아 맹추위도 한낮의 햇볕에 한물 시들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자 각 도매법인마다 과채류(상자 채소) 경매가 시작됐다.

중도매인들이 경매사가 호명하는 물품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며 응찰기를 누른다.

각 도매법인에 소속된 중도매인들과 경매사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물건을 잘못봤다", "응찰기를 잘못 눌렀다"며 중도매인들이 다시 경매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중도매인이 실수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입력해 낙찰됐을 땐 경매사가 직권으로 그 물품 경매를 무효화시키기도 한다.

간혹 너무 친해지다 보니 말썽이 나기도 하지만 매일 부대끼는 사람들끼리 규율보다 더 중요한 관행의 룰이 정(情)을 나누듯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농산물도매시장과 왕복 6차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수산물도매시장에도 이른 새벽부터 불이 켜진다.

도매시장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말처럼 매일 경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어(鮮魚) 경매가 새벽 4시쯤 이뤄지는데다 일찍부터 물건을 떼러 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자체가 그리 활성화되지는 못해 상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산물도매시장 개장때부터 근무해왔다는 한 경매사는 처음엔 활어 중도매인이 7, 8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1명뿐이고, 선어 및 건어 경매 참가 인원도 평균 15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중도매인, 경매사에서부터 판매원, 날품팔이에 이르기까지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은 줄잡아 700여명.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단 하루로 짧았던 신년휴무의 아쉬움을 달래는 새해 첫 일요일에도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송회선기자 s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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