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성진칼럼-법치, 왜 안되는가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국민의 약 67%는 우리 국민이 전반적으로 법질서를 비롯한 사회질서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다(2001년 국정홍보처 국민의식조사). 국가권력발동의 근거가 특정한 사람이나 세력에 있지 않고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있다는 것이 법치주의의 기본내용인데 바로 그 기본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구한말 1895년 이른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법률 제 1호인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된 시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법치주의가 도입된지도 어언 100년이 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처럼 법치주의 내지 법에 의한 지배의 원리가 국민의 생활과 의식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근본원인이 무엇인지를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우리의 정신문화적 배경을 들 수 있다고 본다.

유교적 가치관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신풍토하에서는 예(禮)나 인륜, 도의 등의 덕목이 세속적인 법에 우선하는 것으로 관념되어온 점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소 고발로 법에 호소하는 것은 지극히 야박한 일이며,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표현은 한 인격에 대한 매우 호의적인 평가로 생각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 실학사상가인 다산선생도 그의 '경세유표'란 저술에서 '예가 먼저이고 법은 다음이다(禮主法從)'라는 표현을 쓴바가 있다.

둘째로 국민들이 겪은 정치 사회적 경험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일제가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토지조사령'이니 '치안유지법'이니 하는 법령들을 마음대로 제정 시행한 바가 있는데다가 광복 후에도 자유당정권이나 권위주의적 군사정부가 1인 통치를 합법 영구화하기위한 수단으로 헌법을 함부로 개정하고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긴급조치를 남발한 전력이 있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법의 제정이나 개정 자체는 물론 그 내용에 관하여도 점차적인 불신감이 배태되어 왔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법은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집권자의 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한 도구라는 관념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셋째 일부 형평을 잃은 듯이 보이는 법적용 현실을 간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면권의 남용도 이의 한 사유가 된다고 보여진다.

법이 만민에게 평등하게 집행되지 않고 가진자나 교활한자 또는 특정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된다고 생각될 때 법에 대한 외경이나 준수의지는 박약해질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정신문화적 배경이나 정치 사회적 경험 때문에 법치주의가 쉽게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점에 관하여는 이를 단시일내에 치유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민주국가에 있어서의 법이란 타율적으로 요구되는 강제적 명령시스템이 아니고 합의 의론에 의하여 시민스스로가 행동조정을 하는 절차적 틀이라는 점을 국민에게 이해시키면서 나라의 지도자들이 꾸준히 준법의식을 높이고 법을 도구로 한 통치 (Rule by Law)가 아닌 법에 의한 통치(Rule of Law)가 실현되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법이 사람이나 사건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정하지 않게 적용된다고 보는 다수국민들의 시각에 대하여는 법원 검찰을 포함한 법집행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의 심각한 책임의식과 자성이 필요하다.

사면권을 남용하는 대통령이나 법집행기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의 언동에도 적지않은 책임이 있을 것이다.

건국 후 최초로 뽑힌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부 아래에서는 법운용 시스템을 일부 재편하고 시민의 사법참여 기회를 확대하여서라도 법치주의의 혜택이 온 국민에게 골고루 미치고 법의 지배 원리가 국민의식과 생활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일관되면서도 사려깊은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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