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북 업그레이드 이것만은 버리고 가자-(9)학연·지연의 족쇄

학연(學緣)의 사전적 정의는'같은 학교를 나온 관계로 생기는 인간관계'이다.

또 국어사전은 지연(地緣)을 '태어나거나 살고 있는 지역을 근거로 하는 사회적인 연고관계'로 정의한다.

그러나 연(緣)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배타적 권력을 상징하며 특권을 누리는 사회적 관계로 인식한다.

이른바 '경북중고' '대구상고' '우리가 남이가' '경남고' '광주일고' '경기고' '경복고' '축구계의 연고대' '서울대' 등이 연(緣)혹은 맥(脈)이라는 접미사와 함께 쓰일 때 '끌어주고 밀어주는' 배타적 권력관계로 해석되기 일쑤다.

대구의 한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정모씨는 10년 전 자신이 학부생이었던 시절과 별반 차이가 없는 강의를 박사과정에서도 답습하고 있다.

석사를 마칠 무렵 다른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포기했다.

타 대학의 박사학위로는 시간강사 자리도 얻기 힘들 것이라는 선배들의 충고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의 학과에는 타 대학 출신 교수가 드물다.

드물게 입성한 타 대학 출신 교수도 '서로 네 인맥은 안 된다'는 학과 내의 인맥간 다툼으로 어부지리를 얻었을 뿐이다.

기업인 김모(63)씨는 외견상으로 대구의 ㄱ 중학교와 ㄱ 고등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ㄱ 중학교를 졸업했을 뿐 다른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런 김씨이지만 ㄱ 고등학교의 모임이라면 빠지지 않고 참석, 친분을 다진다.

그가 내심 찜찜한 마음을 누르고 이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는 사업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각계의 실력자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여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히딩크 감독을 기억한다.

히딩크는 축구계의 대표적 학맥이었던 고려대-연세대의 틀을 무너뜨렸다.

또 한국 축구의 대들보로 통하던 선수들에게도 똑같은 체력시험 통과를 요구했다.

히딩크는 주전과 비주전, 학맥을 무너뜨리고 경쟁 구조를 도입, 월드컵에서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대통령학'의 저자인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지연과 혈연, 학연 등 인적 네트워크 위주의 시스템이 대구 경북의 문제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다만 대구 경북의 인구가 많고 기득권을 오래 유지해왔기 때문에 비판의 표적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함 교수는 대구 경북이 한국 사회를 이끌어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이제는 지연 학연 등 연(緣)을 끊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구 경북이 먼저 변해야 호남이 변하고 그래야 한국 사회 전체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벌 없는 사회' 대표인 연세대 홍훈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은 집단적 차원에서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패거리를 형성해 공적인 영역에서 서로 밀어주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니 실력 있는 사람이 기회를 가질 기회가 적어지고 그만큼 경쟁력 저하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외국의 경우 학연, 지연 등이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며 "이제는 인사의 투명성, 승진 채용의 명확한 기준, 이의(異議) 호소 장치 등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인다.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그만큼 시대적 요구에서 멀어질 뿐이라고 홍 교수는 강조한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을 고려해주지 않으면 야박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그런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능력 없는 사람을 쓸 경우 집단이 망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홍 교수는 누가 이런 시대에 먼저 적응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며 대구 경북이 타 지역보다 한발 앞서려면 타지역보다 앞서 학연 지연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3년 동안 인력관리, 구조조정, 인력개발 컨설팅과 교육업무를 담당해온 아이다 삭스 '맨파워 컨설팅 코리아 이사'는 "한국인은 강한 학연을 갖고 있으며, 내세울 만한 학연이 없는 사람은 좀처럼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는 한국사회의 경쟁력을 반감시키는 치명적인 요인"이라며 시급하게 개선할 것을 조언한다.

그는 입시당시의 실력으로만 사람을 평가할 경우 잃는 부분이 훨씬 많다고 말한다.

한국의 정치·경제계 리더들이 학벌과 학연보다 개인의 재능을 중시할 때에만 한국이 자랑하는 인적자원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 날 미국 기업의 성공기반은 인재에 대한 유연한 접근이었다며 대구·경북뿐만 아니라 한국이 세계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학연과 지연을 떨쳐버리고 능력에 의한 공정한 평가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일정한 기준을 통해 선발된 사람들이 뭉쳐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점은 인정해야 한다"며 대구 경북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학연 지연 보수성 등이 한국을 역사이래 최강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박 교수는 "시대적 요구가 변한 만큼 변화에 맞춰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학연이나 지연보다 더 진보된 개념인 개인의 능력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는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나라나 한 집단은 스스로 망하는 것이며 외적은 저항할 힘을 잃고 죽어 가는 자의 목을 칠 뿐이다"는 말로 대구 경북을 비롯, 한국 사회 전체의 자기 개혁을 당부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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