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모데라토

한국이 시장 경제로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라면 그 반대편에는 러시아가 있다.

한국과 이웃이면서도 러시아는 시장 경제로 실패한 나라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경제의 몰락은 벌써부터 예견됐었다.

당연히 시장 경제의 상대적 우월성도 입증된 셈이다.

지금은 시장 기능을 거의 신격화(神格化)할 정도로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가 시장 경제를 도입한지 오래됐지만 아직까지 자본주의의 과실(果實)을 따먹지 못하고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이행을 하면 단기적으로는 침체를 겪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이 경제학 원론이다.

그러나 러시아 경우를 보자. 2000년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은 89년 대비 3분의 2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당시 2%에 불과하던 빈민층은 10년이 지난 현재 23%를 웃돌고 있다.

특히 어린이의 50%가 빈민층에 속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시장경제 도입 이후 국민 평균 수명은 3년이 짧아졌으며 인플레를 따라잡지 못하는 소득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해 이민이 급증, 인구가 10%이상이나 감소했다.

덕분에 우리 나라는 술집에서 러시아 미녀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지만 러시아 젊은이들은 조국의 암담한 미래에 좌절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는 십중팔구 나라를 떠날 경비를 마련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나라의 정체성(正體性)마저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오죽하면 배고픈 서민들은 구 소련 체제로 돌아가자며 시위를 벌이겠는가.

세계 최대의 천연자원을 가진 러시아가 시장 경제 도입 이후 이처럼 급격히 무너진 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전(前) 세계은행 부총재이자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인 스트글리츠의 분석은 압권이다.

그는 '세계화와 그 불만들'이라는 저서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서방국가가 러시아의 시장 자유화를 너무 서둘렀다고 지적하고 있다.

계획 경제가 하루 아침에 수요 공급 경제로 바뀌니 인플레가 폭발했고, 이를 우려해 긴축정책을 강화하다보니 화폐부족으로 현물거래가 성행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결국 가격 시스템이 붕괴돼 버린 것이다.

특히 사유화(私有化)를 너무 성급하게 실시한 것은 큰 실수였다.

사유화가 경쟁을 유발하기는커녕 지방 정부나 기득권층은 국가 재산 빼돌리기에 혈안이 됐다.

200억 달러가 넘는 구제 금융이 며칠만에 소수 권력자들에 의해 거덜이 날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빈부 격차는 극에 달하고 폭력과 '마피아 자본주의'가 시장을 지배한 것이다.

러시아는 저 높은 정상을 향해 달린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의 경쟁'(A race to the bottom)을 한 셈이다.

그래서 스티글리츠는 러시아 경제의 파탄 원인을 '속도 조절'의 실패로 요약한다.

시장 경제를 위한 사회적 인프라는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급격한 개방과 개혁을 추구한 결과 부작용이 불거져 결국 부패 공화국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러시아 경제를 새삼 돌이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이념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

해방 이후 50년 동안 오로지 '성장'을 목표로 하다 이제 '분배'라는 새로운 화두를 안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분배'문제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생소한게 현실이다.

특히 분배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는 극단적 대립 구도를 보이고 있다.

2030세대와 5060세대, 굳이 이를 '진보'와 '보수'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지만 두 계층의 시각차는 뚜렷하다.

전쟁을 전후한 세대인데다 트로트와 힙합으로 대변되는 문화적 격차, 최근에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까지 겹쳐 계층간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처럼 세대 구분이 대립 구도화된 사회는 이념 개혁의 속도를 조절해야한다.

분배 정의는 반드시 실천돼야할 국가적 명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반세기를 지탱해온 보수적 이념체계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새 정부가 쏟아놓고 있는 분배 정책이 너무 '좌향 좌'가 아니냐는 일부의 우려도 이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만 천천히 부어야 한다.

'알레그로'보다는 '모데라토'- 러시아 경제가 던져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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