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노무현팀의 취임사는...

노무현 당선자의 제 16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인수위가 '대통령 취임사 준비 위원회'란 기구를 구성한지도 오늘로써 열 이틀이 지났다.

취임사 작성 준비위원은 대학교수, 소설가, 전직 언론인, 그리고 인수위 측근 인사와 당선자 비서실 홍보팀장 등 모두 아홉명이나 된다.

취임 당일 이십분 남짓 한번 읽고 넘어갈 취임사 원고 작성에 아홉명의 내로라 하는 문객과 교수들이 40일 넘게 매달려 말글을 다듬는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요란스런 과잉 의전이란 이견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취임사라는게 새정부 지도자의 통치철학과 이념, 국정운용의 향방을 밝히는 첫 대국민 인사말인 만큼 보다 깊이있는 내용을 담아보려는 정성 쯤으로 받아들여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마도 이번 정부는 유난히도 개혁과 변화를 강조해 온 정치세력임을 자부하고 있는 만큼 역대 어느 대통령의 취임사보다 감동적이고 개혁분위기가 넘치는 취임사를 쓰고 싶을거라 짐작된다.

국민들로서도 이왕이면 신선하고 감동적인 멋진 취임사를 듣는 것이 나쁠 것도 없다.

문제는 건국 이래 8명의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할 때마다 현란한 문체로 다듬어진 취임사가 읽혀졌지만 퇴임 후에 새삼 되돌아 읽어보면 한결같이 실제 통치는 취임사와 반대로 끝났던 허언의 말잔치를 이번만은 되풀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미리 충고드린다.

1948년 8월15일 제1대 대통령에 취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8번째 대통령인 김대중 현 대통령의 취임사까지 55년간의 우리 대통령들의 취임사를 되돌아 읽어보면 얼마나 허언에 찬 말잔치들이 많았던가를 탄식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유난히 '하느님'과 '맹세'라는 단어를 즐겨 썼지만 하느님의 정의와는 반대로 부정부패 정권의 상징이 돼 무너졌다.

제2대 윤보선 대통령은 '경제적 자유에 뿌리박지 않은 정치적 자유는 꽃병에 꽂힌 꽃처럼 곧 시들어 버린다'는 말로 경제재건을 외쳤지만 8명 대통령 취임사 중 가장 짧은 분량의 취임사 만큼이나 짧은 집권으로 경제의 경자도 손써보지 못하고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 또한 많은 위대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8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유신'이란 단어를 13번이나 썼을만큼 유신을 통한 국가재건을 강조했으나 바로 그 '유신'에 의해 무너지는 비극을 안았다.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사는 유난히도 헌법개정 문제에 집착한 인상이 강했다.

전체 취임사의 약 30%를 헌법문제에 언급했다.

그 자신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해 간접 선출된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헌법수호는 고사하고 군부의 초헌법적 힘에 밀려 퇴진했다.

전두환 대통령 역시 예외없이 취임사의 강한 결의와는 달리 축재 등으로 인해 YS정권으로부터 사상처음 대통령 구속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노태우씨 경우는 역대 대통령 중 취임사가 가장 길었던 대통령이었다.

믿어달라는 사람들 특유의 말 버릇답게 갖가지 수사와 다짐이 유난히 많았다.

그럼에도 취임사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국민화합을 강조하며 자기개혁을 말했던 그는 친구를 용서 대신 백담사로 보내고 축재로 반자기개혁의 처벌을 받았다.

부패척결, 경제살리기, 국가기강세우기 세가지를 취임사 국정과제로 내세웠던 김영삼씨도 자식의 부패, IMF 파탄초래를 부르며 '신한국'이란 단어를 10번이나 썼던 취임사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어떠한 특혜도 지역차별도 용납않겠다'는 취임사와는 달리 편중인사로 국정을 흐트렸고 대학입시 등 교육개혁을 가장 강조했으면서도 교육하나는 철저히 실패한 정권으로 지목됐다.

그러고 보면 취임사의 통치철학을 초지일관 견지하고 화려한 단어로 치장한 대국민 국정약속을 제대로 지켜낸 대통령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셈이다.

취임당시에야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된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취임사의 단 한구절도 어길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취임사가 화려하고 거창하고 비장할수록 그래서 다 지켜내기가 어려운 걸 내세울수록 거꾸로 퇴임때마다 또 한사람의 허풍쟁이 전직 대통령만 더 만들어내게 된다.

따라서 취임사는 담백하고 진솔하며 작은 약속부터 내거는, 마치 고향 친구에게 보내는 안부편지 같은 것이라야 좋다고 본다.

취임사는 좋은 말만 골라 들려주는 주례사나 러브레터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회는 40일동안 과연 어떤 명문의 취임사를 내놓을까. 아마도 '개혁'이란 단어는 네댓번 이상 들어갈 것 같고 부의 분배문제나 민주, 노동권, 세대간 지역간의 화합 얘기 또한 빠질리 없을 것이며 대북문제는 전임 대통령들이 했듯이 대화를 통한 평화공존과 통일안보란 표현으로 제시할 것이라 짐작된다.

지킬 수 있는 다짐이라면 무지갯빛 약속이라 할지라도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단 한구절이라도 지키지 못할 허장성세의 허언만은 없어야 한다.

좋은 취임사는 머리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써야 국민들의 가슴도 함께 열린다.

아홉번째 노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유려하고 거창하고 화려한 겉말보다 투박해도 믿음이 담긴 속말들만 가득 담겨지기를 기대한다.

허풍스런 말잔치에 속을 국민은 이제 더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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