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설쇠기와 설쉬기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텔레비전에서 설날 노래가 들리고 감나무에 앉았던 까치들이 날아가는 그림이 보인다.

방송 담당자는 섣달 그믐날이 까치들의 설인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섣달 그믐은 원래 아이들이 새로 마련한 설빔을 입어보는 날이다.

아이들의 설빔은 다섯 색깔의 원색을 이용하여 곱게 마름질한 까치저고리와 까치두루마기로 상징된다.

이때 '까치'는 까막까치가 아니라 화려한 색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은 모습을 '까치노을'이라 일컫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아이들이 섣달 그믐날 밤에 색동옷인 까치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보면서 벌써 설의 즐거움을 누린다.

이를 상징적으로 '까치설'이라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서정이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설을 손꼽아 기다렸다.

설빔을 입는 기쁨은 물론, 맛있는 설음식을 마음껏 먹고, 윷놀이와 같은 놀이를 할 수 있는 데다가 어른들로부터 세뱃돈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설이 별로다.

과거에는 어른들이 세뱃돈 외에 명목 없는 돈을 주지 않았다.

용돈은 아예 없었다.

세뱃돈보다 많은 용돈을 받아쓰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이 대수롭지 않다.

설빔도 마찬가지이다.

평소에 철철이 새 옷을 유행 따라 입는 아이들에게 설빔이 따로 없다.

설빔에 대한 기대도 '까치설'도 사라졌다.

보리밥과 된장 김치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에는 설날 음식들이 대단한 별식이다.

그렇지만 치킨과 햄버거, 피자를 즐기는 아이들에게 차례 음식은 한갓 '밥맛'이다.

까치설을 까치들의 설날로 아는 이들은 설을 '쉬는 날'로 알기 일쑤여서 '설 잘 쉬셨습니까?' 하고 새해인사를 한다.

설은 쉬는 날이 아니라 '쇠는 날'이다.

당연히 '설 잘 쇠셨습니까?' 하고 인사해야 한다.

설은 휴일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명절이다.

한 해가 처음 시작되는 날인 까닭에 시작의 의례를 해야 마땅하다.

아침에 어른들께 문안인사 드리듯이 새해 첫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어른께 세배를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의례를 스스로 겪어 보내는 것을 '쇠다'고 한다.

설날 연휴에 국내외 유명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설을 쇠지 않고 쉬는 것이다.

나이를 곤백살 먹어도 설이 무슨 날인지 모르면 설을 쉬게 마련이다.

설을 쉬는 사람은 설을 쇠는 문화적 경험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올해 몇 살 먹었는고?' 물으면, 요즘처럼 설을 앞두고 있을 때는 "설 쇠면 9살이에요"하고 답한다.

우리는 서양과 달리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리지 않고 설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리는 까닭이다.

따라서 정월에 난 사람은 온 살을 먹지만 섣달에 난 사람은 한 달만에 나이를 먹는다.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기간이 아니라 설을 몇 번이나 쇠었는가 하는 문화적 경험을 헤아리는 것이다.

나이를 뜻하는 '살'은 바로 '설'에서 온 말이다.

더 희한한 일은 서양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가 0살인데 우리는 벌써 1살이다.

섣달에 난 사람은 한 달만에 2살이 된다.

몹시 불합리한 것 같지만 연령관과 생명관의 차이를 알면 쉽게 이해가 된다.

우리는 얼마동안 살았는가 하는 물리적 시간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문화적 시간을 더 중요시한다.

설을 쇠는 것은 그만큼 문화적으로 성숙되는 것이다.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하는 나이가 물리적 연령관이라면 설을 기준으로 하는 나이는 문화적 연령관에 의한 것이다.

태어날 때 한 살의 나이를 부여하는 것도 태아를 하나의 생명개체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자궁 속에서 설을 한 차례 쇠었다고 보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은 개체분리설에 따라 태아를 생명으로 보지 않는 까닭에 나이도 없고 낙태수술도 예사로 해왔다.

우리는 태아를 생명으로 인정하므로 태교의 전통이 뿌리깊다.

교육학에서 태교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최근에 태교를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태아도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처럼 설을 제대로 알면 우리 문화는 물론 연령관과 생명관까지 포착할 수 있다.

'자넨 올해 몇 살 먹었는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설의 이치를 모르면 나이를 헛먹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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