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조지훈'
한겨울, 미끄러운 눈길도 아랑곳 않고 주실마을에는 요즘도 멀리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8)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이다.
향년 49세에 숙환으로 세상을 떠날때 선생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은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금도 주위에서는 선생이 20년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민족정신문화에 보다 큰 공덕을 세웠을 거라며 아쉬워 하고 있다.
본명은 동탁(東卓)이고, 관향은 한양(漢陽), 호가 지훈(芝薰)인 선생은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에 한의학의 대가였던 해산(海山) 조헌영(趙憲泳)의 둘째 아들로 1920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탈한 성격에 재능도 출중했지만 당시 왜정 학교교육을 받지않아 중학교 졸업장 없이 전문학교 검정시험으로 혜화전문학교에 입학, 문과를 졸업했다.
지훈은 1939년 20세 나이에 '문장(文章)'지에 세 번 추천 받아 문단에 데뷔한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 '석문(石門)'에 '원한도 사모칠량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서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에서 나타나듯 나라뺏긴 망국민족의 설움과 억울함을 토로했다.
시작(詩作)만으로는 그 한(恨)을 달래고 풀 수가 없자 술에 취하기도 했고 한때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은둔생활도 했다.
광복 후에는 말살된 민족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명륜전문학교 강사로 있으면서 한글학회와 진단학회에서 국어·국사교본 편찬위원을 맡아 잃어버렸던 교육기본을 닦는데 주력했다.
1946년 경기여고 교사로 출발, 고려대 문리과대학 조교수·부교수를 거쳐 교수가 됐다.
시인은 박목월·박두진 시인과 함께 '청록집'을 냈고 '풀잎단장(斷章)''역사 앞에서''여운(餘韻)''창(窓)에 기대어'등 시집과 '시의 원리''시와 인생'등 시론집(詩論集), '한국문화사 서론''한국독립운동사''신채근담'등의 저서로 학계에 공헌했고, 민족정신 진흥에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1957년 자유문학상 수상과 1961년 벨기에 국제시인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신시60년 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며 국내 시단의 지도자 역할을 다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는 내용의 지조론 저술은 50평생 맑은 절개를 지켰고, 왜정시대엔 일제배척, 해방후에는 좌익세력의 발호를 물리치는데 경륜있는 논객의 역할을 다했던 인간 조지훈의 궤적을 엿볼 수 있다.
강직한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편협이나 완고함이 선생에겐 전혀없이 도량이 크고 넓고 정도 많았다.
1982년 8월15일 제37주년 광복절. 영양 소년 지훈이 어릴적 즐겨 뛰놀며 시심을 키우던 주실마을 울창한 숲속에는 문하생들이 정성을 모아 시비를 세웠고 이곳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중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장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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