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칠곡 유학산

새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1월 한 달도 훌쩍 지나가고 어느덧 2월이다.

어제가 입춘이었으니 이젠 추워진다고 해도 잠깐 잠깐씩 찾아올 꽃샘추위뿐이리라. 이번 겨울엔 예년보다 눈이 많이 내렸는데도 마음 편히 눈(雪) 구경 한번 못한 사람 은 당연히 아쉬움이 들 때.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다 짓이겨 놓은 유명 설산(雪山)을 뒤늦게 찾는 것은 재미가 없다.'대구서 멀지 않으면서 사람 손을 덜 탄 설화(雪花)가 만개해 있는 곳은 없을까' 고민되는 사람은 유학산으로 머리를 돌려보자.

유학산(遊鶴山)은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학산리와 석적면 성곡리 접경지역에 동서로 길게 병풍처럼 뻗어있다.

학이 둥지를 틀고 놀았다고 해서 유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 산은 6·25 전쟁 때는 대구 사수의 교두보였다.

정상 해발이 839m로 그리 높지 않으나 많은 명소가 있는 것은 물론 우리민족의 아픈 상흔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암벽등반 연습장으로 산꾼에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반인들의 발길은 그리 많지 않다.

산행코스는 단 1개. 가산면 학산1리 팥재주차장에서 시작해 도봉사, 헬기장, 정상을 거쳐 다부리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다.

반대쪽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지만 오르막이 길고 가팔라 힘이 든다.

설 연휴 시작 하루 전인 지난달 30일 취재진은 팥재주차장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택했다.

눈이 많지 않고 길이 얼지 않았다면 등산로가 본격 시작되는 도봉사까지는 차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팥재주차장을 출발해 10여분 걸었을까? 거대한 암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펼쳐지는 암벽은 높이가 어른 키의 50배 정도 된다.그래서 '쉰질바위'라 불린다.학이 놀던 곳이라고 '학바위'라고도 한다.그러나 학은 보이지 않았다.

신라시대에는 쉰질바위 밑에는 천수사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봉사가 천수사를 대신해 절벽을 병풍 삼아 자리하고 있다.스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찰 앞마당의 눈이 한쪽으로 치워져 길이 나 있었다.

부처님이 춥다고 한 것일까. 대웅전 정면 출입문은 비닐로 완전히 봉쇄돼 있고 옆문에도 비닐이 쳐져 있다.대웅전 앞에서 올려다보는 쉰질바위 꼭대기는 까마득하기만 하다. 사찰 오른쪽에도 등산로가 있다지만 눈에 덮여서인지 보이지 않는다.인기척을 듣고 나온 보살이 왼쪽 등산로를 권한다.오른쪽 길은 겨울엔 가는 사람이 없어 너무 위험하다며.

길이 6.25㎞, 폭 2m로 산행 종점인 다부리까지 연결되는 왼쪽 등산로(유학산 6·25 격전지 순례 탐사로)는 지난 2000년 공공근로사업으로 만들어졌다.들머리가 나무계단으로 돼 있는데 이곳부터 본격 산행이 시작된다.

눈이 발등을 덮는 길을 20여분 걷다보면 숨이 가빠진다.바람이라도 좀 불어주면 좋으련만 바람은 어디에서 쉬고 있는 듯 기척을 찾아볼 수 없다.

조금 더 나아가니 사람들이 가까이 있으니 눈 때문에 길을 잃었더라도 너무 겁먹지 말라고 하는 인간의 흔적이 나타난다.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넣어둔 함으로 지역 소방서와 의용소방대원들이 공동으로 만들었다.겉에는 현재위치가 표시돼 있고 함 안에는 들것을 만들 수 있는 나무조각과 삼각건 등이 들어 있다.낯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그들의 배려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용기를 얻어 30분 정도 더 올라가니 작은 평원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막혔던 시야가 터진다.헬기장이다.가을에는 이곳 갈대가 '한경치' 한다지만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눈에 다 덮여서인지 그리 볼품은 없다.지척에 있는 산 정상 전망대(팔각정)에 오르니 동쪽으로는 팔공산이, 서쪽으로는 낙동강과 함께 구미 금오산이, 남쪽으로는 가야산 정상이 보인다.우리나라 산이 정말 국토의 70%밖에 안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빨리 올라와 보라고 손짓했던 전망대가 기분이 변했는지 세찬 칼바람으로 퇴청(退廳)을 강요한다. '최고 고지를 너무 쉽게 내 준 것이 억울하다'는 산의 기분을 헤아린 듯하다.

이제부터는 대충 내리막길. 그렇지만 산은 몸 전체까지 쉽게 내 주기는 것은 강하게 거부한다.침입자에게 마냥 편한 진군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으로 행보를 더디게 하기도 하고, 길을 감춰 헤매도록 하기도 한다.초등학교 고학년 미만의 자녀를 동반한다면 이 정도에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상인 팔각정(893고지)에서 유학산 마지막 고지인 674고지까지는 3.19㎞로 2시간 정도 걸린다.발이 푹푹 빠지는 산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도 되지만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쾌감은 몸고생을 충분히 보상해 준다.또 각 고지(837고지, 793고지)마다 다르게 보이는 주변 경관은 다른 어떤 산에서도 느낄 수 없는 맛이 있다.

최근 내린 눈을 그대로 이고 있는 소나무, 규모는 히말라야 등 해외 큰 산에 있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받침없이 삐죽이 나와 있는 '눈처마'도 볼거리다.이 구간에서는 6·25전쟁때 전사한 국군 유해가 최근 발견되기도 했다.

중앙고속도로가 눈에 들어오는 674고지에 서면 눈길 산행은 대충 끝난다.하지만 방심은 금물. 눈 대신 습기에 젖어 있는 낙엽이 장애물로 나서기도 한다.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발목에 힘을 주고 1시간 정도 더 내려와야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있는 다부리에 다다를 수 있다.차를 세워둔 팥재주차장까지 특별한 교통편이 없어 걷거나(1시간 정도 소요) 택시(요금 8천원)를 이용해야 한다.

▲가는 길:1. 중앙고속도로 다부IC에서 내려 왜관 방면으로 5분 정도 가면 고갯마루 정상 부근 오른쪽에 '유학산 839고지, 팥재주차장 입구' 표지판 나옴. 2. 경부고속도로 왜관IC에서 내려 가산 방면으로 20분 정도 달리면 오른쪽으로 도개온천~조금 더 가다 보면 고갯마루 넘자마자 도로 왼쪽으로 팥재주차장 표지판. 단 도개온천 바로 앞에도 '유학산, 팥재주차장' 표지판 있으나 차는 진입이 불가능하다.

▲인근 가볼 만한 곳

요술의 고개: 칠곡군 석적면과 지천면 경계지점에 있다.

1999년에 만들어진 이 도로의 길이는 180m 정도. 승용차로 일단 정차 후 내리막임을 확인하고, 종점에 가서 시동을 끄고 기어를 풀면 차가 미끄러지듯 오르막을 올라간다.

팥재주차장 입구에서 왜관 방면으로 가다 도개온천을 지나 첫 삼거리에서 황학·지천 방면으로 좌회전 후 2.9㎞.

다부동 전적기념관: 6·25전쟁 때 55일간의 항전 끝에 대구를 지킴으로써 북진의 발판을 마련한 다부동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국방부가 탱크모형으로 만들었다.

다부IC 바로 옆에 있다.

도개온천:게르마늄 함유 유황온천으로 2천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

▲식당:순두부 정식(1인분 3천500원)을 주로 하는 현풍식당(054-975-1419)이 도개2리 새마을회관 앞에, 굴밥정식(2인분 1만6천원)과 장어구이 정식(2인분 2만4천원)이 주메뉴인 숟가락젓가락마을식당(054-972-7466)이 팥재주차장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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