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2003-로또 복권 백태

"연구를 좀 해야죠. 3개까지는 맞추겠는데 그 다음엔 좀 어렵네요". "오늘은 느낌이 팍 오는 것 같아요. 2장은 내가 하고 나머지는 가족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볼랍니다".

4일 대구시 중구 포정동의 한 복권방. 어느 공사장 현장 상황판을 방불케하는 큼직한 로또복권 당첨번호 누계표가 3평 남짓한 복권방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당첨누계표를 둘러싼 사람들은 숫자 고르기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아무 준비가 없는 사람들은 토이볼(소형 번호추첨기)로 번호를 가려 쓱쓱 기입한다.

3만원어치를 구입했다는 회사원 박모(41)씨는 "당첨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지만 이번 기회에 도전해보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 같아 욕심을 내게 된다"고 속내를 밝힌다.

구입용지 슬립(OMR카드)과 돈을 지불한 후 영수증(티켓)을 받아든 그의 손이 살짝 떨리고 얼굴엔 보일듯 말듯 미소까지 번진다.

'희망과 재미'라는 긍정론과 '사행심 조장일 뿐'이라는 부정론이 동시에 일고 있지만 요즘 사람들의 관심은 단연 로또복권이다.

직장과 가정 어디서건 화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퇴근길 또는 술 한잔 한 김에 남 몰래 구입한 한두장의 복권을 지갑속에 구겨넣던 풍경과도 또다르다.

힘겨울 것만 같은 자신의 행운을 가늠해보는 시험장 같다.

로또복권과 관련한 다양한 모습을 따라가 봤다.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대구 동성로의 복권카페. "복권 당첨금이 엄청나니까 그냥 재미로 한번 해보는 것"이라는 대학생 김모(22)씨는 친구들 사이에도 요즘 만나기만 하면 복권얘기로 잠을 설치기 일쑤라고 말했다.

한켠 전자오락음이 귓전을 울리는 가운데 복권판매대 앞에서 번호 분석을 놓고 즉석토론이 벌어진다.

설 전에 한번 구입했다가 오늘은 마음먹고 나왔다는 회사원 권모(24·여)씨는 아버지와 반반씩 투자, 자신으로서는 큰돈인 10만원어치를 구입했다고. "당첨된다면 엄마, 아빠께 드리기로 약속했지만 외국의 유명 휴양지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권씨는 "직장 동료들도 점심시간에 조용히 빠져나왔다가 복권방에서 만나 깜짝 놀라곤 한다"며 웃는다.

복권방을 처음 찾은 듯한 스님은 복권 기입방법을 꼼꼼하게 묻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헬스운동을 같이 하고 오는 길이라는 40대 주부 3명은 신문·방송이 '로또'를 하도 자주 보도해서 잘 알고 있다며 학창시절부터 좋아하는 번호를 찍었다고 말했다.

로또복권 판매대행을 맡고 있는 국민은행 복권 판매 창구에서 만난 직장인 최모(50)씨는 "평소 복권은 사행심을 조장하는 요물"이라며 복권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로또복권이 발매된 이후 예전과 달리 요즘 들어서는 스스로도 헷갈린다고 실토한다.

이성적으로는 로또가 바람직하지 않은데 마음으로는 한번 해봤으면 한다는 것.

그러나 또다른 직장인 김모씨는 "당첨 뒤에 일어날 일을 상상만 해도 즐겁다"며 "복권마니아는 아니지만 한번쯤 확률싸움에 몰두하는 것을 꼬집을 일만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로또복권 3회차 추첨에서 1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대구시 동구 동호동의 한 복권방은 두 아르바이트생이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밀려드는 손님을 맞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인근 공단 직장인이나 초로의 노인들에서 가족단위 손님까지 대부분 처음인 듯해 이들의 목소리는 자꾸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 점이 안찍히도록 조심하세요. 단말기에 넣으면 다 읽히니까요". 이들 중 한명은 지난번 1등 당첨자가 한 게임에 숫자를 7개 선택하고 슬립을 내밀어 한개를 삭제해야 된다고 하자 '알아서 삭제'해달라고 하더라는 것. 그런데 자신이 삭제해준 그 조합이 대망의 1등 당첨이 되었다며 스스로도 너무나 놀랍고 믿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판매점에 포상금이 나왔고 약간의 보너스도 챙겼다고 귀띔했다.

현재 로또복권 대구·경북지역 국민은행 지점 및 복권방 판매소는 모두 477곳. 그 중 대구가 339곳에 달한다.

대구의 판매량은 전국 판매량의 8~9%선. 그러나 복권 판매소마다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웃지못할 촌극도 자주 벌어진다고. 특히 나중에 표기할 요량으로 슬립용지만 집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수십장을 판매대에 올려놓아도 몇시간 못가 동이 나기도 한다.

용지수급에 차질이 생기자 공단지역 등 일부에서는 이미 사용한 슬립을 화이트로 지운 후 다시 사용하는 방법을 동원한다.

복권 판매소의 한 점주는 가끔씩 슬립용지를 돈을 주고 구입했다며 판매소에서 막무가내를 부리는 경우나 슬립용지 한장 5게임 중 한개가 아니라 전체에서 당첨번호를 찾아보고는 이번에 당첨됐다고 난리법석을 부릴 때는 그냥 웃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또 1, 2만원씩 재미삼아 하던 사람들이 최고 10만원까지 베팅하는 경우는 이번 주를 고비로 점차 숙지고 다음주부터는 대부분 평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이 점주는 덧붙였다.

복권 판매 시스템 사업자 KLS 대구 이두원(41) 본부장은 "로또복권을 지난해부터 발행, 성공을 거둔 대만의 예에서 보듯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으나 이 정도까지 빨리 호응을 얻을 줄은 미처 짐작못했다"고 말했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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