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별아! 또 글자를 거꾸로 썼잖아!" 유치원에 다녀 와 가방을 던져 놓고 동생들과 놀던 한별이(6). 다그치는 소리에 얼굴이 굳어졌다. 왼손잡이 한별이는 아무리 가르쳐도 글자를 거꾸로 쓴다.
쿵쾅거리며 뛰어 다니던 진영이(7) 서현이(5.여) 남매, 가을이(5.여) 승준이(4) 남매는 뭔가 싶어 한별이의 공책을 보려고 까치발을 세웠다. 글자를 모르는 어린이들이지만 공책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칠곡 북삼면의 한 아파트 13층. 하루가 멀다하고 다섯 어린이들과 '젊은 엄마' 사이에 소동이 벌어지는 이곳의 이름은 '아이 꿈 터'. 젊은 엄마는 사회복지법인 가정복지회 소속 사회복지사 김희영(26)씨이고, 부모가 이혼했거나 생계때문에 기르기 힘든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을 받는다.
대학에서 아동학을 전공한 김씨는 미혼이지만 2001년 9월 기꺼이 이곳 발령을 받아들였다. 그 후 구미의 집으로 퇴근한 적이라고는 아이들의 부모 면회일이나 명절 뿐. 이곳의 '붙박이'인 셈이다.
김씨의 하루는 '육아전쟁'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 아침 7시30분 기상, 아침식사 준비, 눈 비비는 아이들과 씨름하며 밥 먹이기. 유치원.어린이집 가는 아이들 준비물 챙겨주랴, 옷 매무새 봐 주랴… 한바탕 난리가 난다. 그 다음은 빨래와의 전쟁. 하루에 어린이 한 사람이 속옷.겉옷을 꼭 한벌씩은 벗어낸다.
"방에 흩어져 있는 책, 장난감, 인형들을 다 치우고 나면 바로 점심상을 차려야 해요. 오후 2시쯤 아이들이 돌아오면 여기저기 쿵쾅거리고 재잘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밤 9시쯤 아이들이 제풀에 곯아떨어질 즈음에야 겨우 허리를 폅니다".
이곳 어린이들의 위탁 기간은 6개월이 원칙. 하지만 뚜렷한 자립 의지가 인정되면 일년 넘게 맡아 주기도 한다. 이혼한 23살짜리 엄마의 아이도 있고, 미혼모, 방직공장에서 어렵사리 하루를 이어가는 마흔 넘은 엄마의 자녀도 있다. 모두가 힘겨운 가정의 아이들.
"하루는 서현이를 안고 집 부근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편에 있던 다른 아이가 제 엄마를 부르며 칭얼댔습니다. 한참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서현이가 눈길을 떼지 못하더군요. '진짜 엄마'를 항상 가슴에 묻고 살기 때문이겠지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속상하는 일도 적잖다고 했다. 아이들과 가끔 교회에 나가는 김씨를 보고 "왠 처녀가 아이를 키우느냐"는 황당한 소문이 이웃에 돈 것도 그 중 하나. 일반 가정의 아이들과 다투거나 함께 놀다 물건이 없어졌을 때 꿈터 아이들을 먼저 의심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웃들도 일년 넘게 계속되는 김씨의 정성에 감동하기 시작했다. 오해를 풀고 장난감이나 과자를 갖다 주는 사람도 생겼다. 외출 때는 자기 아이들을 '아이 꿈 터'에 놀러 보낼 정도로까지 달라졌다.
김씨가 가정복지회 홈페이지(www.welting.net)에 싣고 있는 '꿈터 일기'에는 스스로의 굳센 다짐이 묻어 있다. "치워도 치워도… 근데 다른 집 아이들도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 이렇게 되나요?"(2002년 10월12일) "식당에서 한 가족이 밥을 먹는 장면을 보고 눈물 흘렸다는 서현이… '우리 엄마 멀리 갔어요', 오늘 따라 어찌나 가여운지 눈물이 글썽거린다"(〃11월22일).
희생과 사랑이 아니고는 천만금을 준다해도 해 내기 쉽잖을 일. "처음엔 너무 외딴 곳이어서 철창 속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우리 아이들과 헤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더 큽니다. 자원봉사자들과 이웃의 큰 사랑을 확인한 것도 보람입니다. 상처받는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는 날이 제 결혼 기념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씨 같은 이들의 이런 마음들이 우리 사회의 어둠을 그나마 걷어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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