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7)지역출신 CEO가 본 대만의 기업문화

지역출신으로 2002년부터 벤처기업 기가램의 CEO(최고경영자)를 맡은 이승훈(39·사진)씨는 타이완의 기업문화에 대해 "엔지니어가 성공하고 경영자가 되기에 너무 편한 곳"이라고 한마디로 말했다.

한국에서의 첫 사업에 실패하고 '기술' 하나만 믿고 1999년 타이완으로 건너온 이 대표는 "한국에서의 사업실패 원인 중 하나가 기술만 있고 국제적 네트워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 전세계 사람들과 사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엔젤투자자의 요구조건을 100% 그대로 수용했다"고 회고했다.

이 대표의 첫 직책도 CEO가 아닌 CFO(기술이사)였다.

그러나 투자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엔지니어인 이 대표를 훈련(?)시켜 2년 반만에 CEO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처음엔 CEO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사회는 투자유치, 자금운영, 포토폴리오 등 경영상 애로가 있으면 적극 도와줄테니 걱정말고 맡으라고 설득했습니다".

타이완 기업은 전문경영인과 투자자들이 주축이 된 이사회가 엄격히 분리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타이완의 투자자는 돈만 있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직접 기업을 경영해 성공시킨 경륜과 인품, 철학을 검증해 통과될 때만 '투자가그룹'에 합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정치적 이유 때문에 몇몇 재벌 2세들이 개인적 업적없이 투자가그룹에 끼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경우 이사회에서의 발언권이 크게 제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타이완의 투자자와 이사회는 전문경영인 보다 회사와 사업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며, 또 단순한 견제자이기에 앞서 전문경영인을 키우는 보육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식회계와 같은 편법이 통용될 틈이 있을 수 없고, 사업실패에 대한 책임도 전문경영인과 이사회가 함께 지기 때문에 경영자의 부담도 적다.

타이완 기업의 M&A(인수와 합병)가 활발한 것도 투자와 경영의 분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벤처기업이 상장해 많은 이익을 냈을 경우 투자자와 이사회는 별도의 계약이 없더라도 전문경영인의 업적에 대해 상당한 배려를 해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경영자를 자신들의 투자가그룹에 합류시켜 주기도 한다.

이런 '나눔의 배려'는 일반 직원들의 채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타이완 젊은이들은 직장을 선택할 때 월급 보다 주식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비록 상장되지 않은 주식이라하더라도 타이완 기업은 실제로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줄 뿐만 아니라 배당 등 주식에 대한 권리를 확실히 보장해 준다.

따라서 비상장 주식도 비공식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이익이 발생하면 타이완 기업은 이익의 10%를 미리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90%를 배당하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다. 기업이 잘되면 직원들은 미리 받은 이익금에다 주식 배당까지 합쳐져 연봉 보다 부수입(?)이 훨씬 많아진다. 일부 외국계 기업들은 이런 관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만 타이완 기업인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돈을 벌었을 경우 아낌없이 나눠주지만, 그 전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색한 것이 또 타이완 기업문화 입니다".

기가램의 경우 투자받은 80억원을 통장에 넣어두고 기업을 시작했지만 인테리어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사무실을 물색하고 중고 복사기와 팩스를 가져와 사무실을 열었다.

물론 직원 인건비를 줄이는 등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인색하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비용은 최대한 줄여라' '내가 직접 벌지 않은 남의 돈(투자받은 돈)은 내돈이 아니다'는 게 타이완 기업에 철저히 뿌리박인 문화다.

기업평가 자료도 한국처럼 매출 중심이 아니라 '순이익'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해보는 장사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엡손(EPSON)과의 거래를 성사시킬 때 한국에서는 익숙치 않은 경험을 했습니다.

엡손측에서 타이완으로 2번, 내가 직접 일본을 2번 방문했지만 한 번도 기술과 제품에 대한 논의는 없었습니다".

엡손의 관심은 오로지 기가램 CEO인 이 대표의 '인생관' '삶의방식' 등 철학적인 것에 집중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경험은 이 대표가 기가램 CEO에 오르기 전에 이사회로부터도 겪었다.

"글로벌 경쟁시대를 맞아 기업이 경영자를 선택하고, 또 세계 일류기업들이 협력업체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기술력'도 '경영테크닉'도 아닌 바로 CEO의 '인생철학'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것을 나 혼자만 할 수 있고, 나 혼자만 해야한다는 닫힌 생각을 버리고 시장상황에 대한 유연한 사고와 함께 역할을 나누는 파트너십을 가질 때 앞으로 출현할 뉴비즈니스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가램 이 대표는 낡은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완전히 새로운 21세기형 뉴비즈니스를 창출하는 것도 고향인 대구·경북의 경제·사회·문화를 부흥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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