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통마을-16대손 김승진씨 등 참여

"내 집엔 보물이란 없다.

단지 보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청백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維淸白)"란 말을 통해 청백을 가법(家法)으로 대대로 이어 갈 것을 후손들에게 엄중히 가르친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

지금까지도 안동 김문의 후손뿐 아니라 다른 유명 문중에서도 보백당의 청렴과 후학양성에 대한 열정, 지조와 겸손으로 덕을 쌓았던 삶을 따르며 유업을 잇고 있다.

특히 묵계리 후손들은 보백당의 유업에 따라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면서도 글 읽고 배우는 선비의 도를 농사일과 함께 게을리하지 않아 그에 관한 일화도 전해져 온다.

문장이 뛰어나다고 자신하는 영천의 한 선비가 이 마을을 지나다 소낙비를 만나 어느 집 처마밑에서 김매기 일꾼들과 비를 피하면서 시 짓기를 벌였는데 일꾼들이 운자가 떨어지기 무섭게 글 한 수씩을 지어 읊어내는지라 "산촌의 농사꾼들이 저 수준이니 안동이란 곳이 대단하구나"하며 돌아갔다는 일화다.

이 마을은 풍산 소산마을에서 태어난 보백당이 연산군 2년 대사간에 올라 벼슬길에 있다 1498년 낙향하면서 형성된 곳. 마을 곳곳엔 보백당의 숨결이 남아 있다.

말년에 은거했던 만휴정(晩休亭)과 보백당을 모신 묵계서원(默溪書院), 종택 등 10여점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보백당의 청백유훈(淸白遺訓)이 가장 큰 의미를 전한다.

선생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 후손들과 타 문중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재)보백당 장학문화재단'을 만들어 후학양성에 힘써오고 있다.

보백당 16대 후손인 김승진(68)씨는 "평생을 선비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사셨다"며 "지난 93년 12월에 선생의 후학양성에 대한 열정과 청백의 가르침을 잇기위해 재단을 설립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종 13년에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입향조인 삼근(三近)공과 영가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10세에 학문에 입문, 16세에 생원시, 17세에 생원회시, 세조 7년에 동당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했다.

그 이듬해 성주교수를 제수 받은 것을 비롯 사헌부 감찰과 고령현감, 부수찬, 대사성, 대사간을 지내다 연산군 4년에 묵계리로 낙향했다.

많은 문객들과 교류하며 여생을 살려했던 보백당은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史禍)때 옥에 갇혀 고초를 겪기도하다 만년에 묵계로 낙향, 87세로 타계했다.

보백당 장학문화재단은 지금까지 20여명의 후학들을 선정해 장학사업을 해오고 있다.

선발 대상자는 후손뿐 아니라 타성 자손들과 청백리 정신을 잇기 위해 공무원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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