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부끄러움을 아는 정치인

이제 임기를 몇 일 남기지 않은 김대중정부는 한국의 IMF 위기를 극복하고 남북한간의 긴장을 완화했으며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것들을 치적으로 들고 있다.

이들에 대한 성과는 인정할 부분도 상당하지만 좀 따져 보아야 할 부분도 있다.

국민다수의 여론이 김대중 정부의 치적을 수긍하고 인정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시중의 여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우선 월드컵 성공을 따져보자. 우리 국민은 월드컵을 열면서 16강이라도 만족했을 것이고 설령 16강을 못했더라면 히딩크를 비난했지 김대중 대통령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북한간에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않았더라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원망했지 김대중 대통령의 무능으로 탓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월드컵을 잘 치러 국가위상을 높여 보자는 데 관심을 두었고 선수들과 감독이 의외로 잘해주어서 천만다행스럽고 고맙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정부와 대통령의 치적이라니 왕조 시대의 성은론(聖恩論)과 비슷하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큰 틀 아래서 남북한 통일은 금방 안되더라도 당분간 전쟁 없는 평화 공존 체제의 유지를 바랐는데 마치 통일의 영웅이나 될 것처럼 성급함으로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지금 북한이나 미국이나 전쟁을 불사한다고 어르렁대는 상황에서 짐짓 태연한 정부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노벨 평화상 받고 축구 4강을 해서 그렇게 위상이 높아진 국가의 특사를 만나주지도 않는 북한이나 미국의 문전 박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남북화해 5년의 결실이 "우리 힘을 합쳐 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치자"는 북한의 화답으로 돌아온 것인가? 신문 사회면은 매춘산업이 농업생산을 넘어서고 있다하고 복권 열풍에 젊은이고 중년들이 정신을 뺏기고있다.

경제 상황은 IMF때보다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경고하는데도 치적을 논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일이 있는지를 묻고 싶은 심정이다.

더구나 북한에 2억 달러인지 5억 달러인지 주기는 준 것이 확실한데 그 동안 부인해온 것은 무엇이고, 이를 '통치 차원의 일'이라고 억지 논리를 펴더니 국회에서 얼버무리려는 작태는 무엇인가. 국익을 자신의 이익보다 더 앞세우는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된다고 국회에서 논의한단 말인가. 돈주고 정상회담 열고 노벨상 받았다는 수모에 가까운 외신의 보도를 듣고 '강력항의' 정도로 그친다면 국가체면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이런 일들이 대선 전에 불거졌더라면 선거결과는 또 어떻게 되었겠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 가야 할 일은 그동안 국민이 속고 여론이 춤을 춰 국민들의 귀와 눈을 가린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또 하나 따져보고 싶은 것은 김대중정부의 '준비된 대통령'은 무슨 준비가 되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자신이 '동서 화합의 기수'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동안의 인사정책과 지난 대선의 과정을 보면 지역감정의 골은 지난 5년 전보다 훨씬 깊게 패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지역감정이란 미묘해서 통계수치를 들이대고 증거서류를 들이대도 안 풀리는 유령 같은 것이다.

사실상 경상도 사람이고 전라도 사람이고 지역감정 가질 역사적 근거나 이를 선호할 현실적 명분이 어디 있는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바로 이를 풀겠다는 사람들이다.

지역감정의 골을 파서 힘 안 들이고 몰표를 얻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정치가야 없겠지만 혹시 이를 가장 성공적인 선거전략이라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혹시 있다면 그에게 '정치인'이라는 점잖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새로운 정부는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뻔히 알면서도 딴 짓을 모의하고 국민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유명우(호남대 교수 한국번역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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