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허술한 재난대비 시스템이 빚은 '人災'

지하철 방화 대참사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가 저지른 참극이지만 * 인화물질로 가득찬 전동차 * 작동하지 않는 재난방지 시스템 * 일단 유사시에 재구실을 하짐 못한 소방.전기 시스템 등이 빚어낸 또 하난의 인재(人災)였다.

◇인화물질 가득한 전동차

18일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이 대형 인명피해를 부른 직접적인 원인은 전동차가 걷잡을 수 없이 붙타면서 뿜어내어진 유독가스였다.

전동차가 그토록 빨리 탄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전동차 내부가 인화성 높은 물질과 유독가스 배출 물질로 채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전동차는 화재 때 유독가스를 방출하는 인화성 물질로 마감돼 있다. 객차 내부 재질은 폴리에틸렌폼 52mm, 바닥 및 천장판은 섬유강화 플라스틱인 FRP, 바닥은 염화비닐로 돼 있다. 객실 의자 시트는 순모 모켓트, 패드는 폴리우렌탄폼으로 인화성이 강하다.

이들 제품이 타면서 불이 급속히 번졌고,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내뿜으면서 인명피해가 커진 것. 특히 좌석 시트는 스판나일론과 스폰지로 이뤄져 있는 데다 전동차 내부 벽면에 붙어 있는 광고용 종이나 플라스틱.아크릴판 등이 불을 더 확산시켰다.

전동차 외벽 부분은 불연성 물질인 그리스울로 만들어졌지만 내부에서 번지는 불길을 막기엔 불가능한 형국이었다. 불이 난 전동차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정모(32.여)씨는 "불이 났다는 소리에 황급히 뛰쳐 나왔지만 벌써 밖은 시커먼 연기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할 상황이었다"고 했다. 한 소방관은 "전동차 내부 제품들은 모두 화재 때 유독가스를 방출하는 것이어서 그 내부는 독가스실과 다름 없었다"고 했다.

◇재난방지 시스템 마비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는 재난방지시스템 마비, 탈출구 봉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불이 난 전동차 맞은편에 정차한 1080호 전동차의 경우 사고 발생 뒤 수동조작을 제대로 하지 않아 10분이나 지나서야 출입문을 열거나 일부 객차는 아예 출입문 자체를 열지 못해 엄청난 승객 피해를 불러온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재난방지시스템 마비

이날 오전 9시55분쯤 안심 방향 1079호 전동차(기관사 최정환.33)가 중앙로역에서 불이 난지 2분 뒤에 반월당~신천역 구간에 전기공급이 끊겼고, 거의 비슷한 시각 대곡 방향 1080호 전동차(기관사 최상열.39)가 중앙로역에 진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지하철 1호선 영대.반월당.신천변전소 등 3개 변전소에서 공급하는 전기가 단전되면서 지하철공사 통신사령실 모니터, 전력 및 운전사령실 등 종합사령실 내 대다수 시스템이 마비돼 전동차 화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전력설비를 운용.통제하는 전력사령실 경우 단전 이후 영대변전소 전력은 50초만에 복구했으나 반월당~신천역 구간에는 별다른 손을 쓰지 못했으며, 비상전력 가동 여부조차 제대로 파악지 못했다. 동시에 각 역에 설치된 22개의 폐쇄회로(CC) TV 중 중앙로역 CCTV 작동이 단전과 함께 멈춰 누전이나 화재로 인해 단전될 경우 전력사령실, 통신사령실 등 재난방지시스템이 무용지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지하철공사 곽정환 종합사령팀장은 "사고 당시 전력사령실 시스템이 다운된데다 중앙로역 역무원이 '역내에 불이 났다'는 전화를 한 후 통신이 두절돼 전동차에 불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무훈 전력사령 과장도 "단전조치는 종합사령실의 지시에 따라 하지만 이번에 별다른 지시가 없었던 것으로 봐 누전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며, "누전에 따른 단전이 발생하면 재난방지시스템 가동이 제대로 되지 않고 비상전력 가동여부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대구지하철공사 측은 사고가 난 두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할 당시 찍힌 CCTV 화면의 녹화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자동운행 시스템 맹점

사고가 난 전동차의 자동운행 시스템은 화재 등 각종 재난에 노출된 채 사고 예방장치가 전혀 뒷받침 되지 않아 언제라도 대형참사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대구 지하철의 전동차 운행시스템은 자동 열차 운전장치(ATC, Auto Train Operation)와 자동제어장치(ATC, Auto Train Control)의 혼합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대구지하철공사 이지우 검수운용담당 과장은 "대구지하철은 전동차가 선로를 통해스스로 움직이도록 돼 있고 역에 도착하면 전동차 하부에 있는 기계장치가 역내 선로에 설치된 센서와 감응해 자동 정차한 후 출입문을 여닫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전원 공급이 끊길 경우 발생하는 운행 불능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이 없다는 것이 큰 맹점으로 드러났다. 이 과장은 "이 시스템의 장점은 인력 절감, 운행 안정성 등이지만 화재 등 외부 충격으로 전원 공급이 끊길 경우 전동차는 그 자리에서 운행 기능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대구지하철공사 정경일 기술담당 과장은 "전동차 단전 때는 자체 비상전력이 전동차에 공급돼 수동식 문개폐와 내부 비상등 작동 등이 가능하고 통상 2시간 정도는 그런 능력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수동조작 지연

이번 사고에서 정작 불이 난 전동차보다는 맞은편에 정차한 1080호 전동차 승객들의 피해가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상당수 목격자들은 대곡 방향의 1080호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순간 단전돼 전동차 내 전등은 물론 역 구내 전등이 모두 꺼졌고 출입문이 잠깐 열렸다 곧바로 닫긴 뒤 10여분간 그대로 있음으로써 피해가 커졌다고 말했다.

1080호 전동차 맨 뒤칸에 탔던 류호정(30.대구 율하동)씨는 "중앙로역 도착순간 전등이 꺼지면서 문이 잠깐 열렸으나 연기가 새 들어오면서 곧바로 닫기는 바람에 승객들이 전동차안에 갇혀 아비규환이었다"고 말했다.

류씨는 또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곧 출발합니다'란 안내방송이 나온 뒤 10분쯤 후에 '사고가 났으니 밖으로 대피하십시요'란 안내방송과 함께 문이 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고발생 직후 본보 취재진이 현장을 확인한 결과 1080호 전동차 출입문은 대다수 닫혀 있는 상태였으며 일부 출입문만 열렸거나 부서져 기관사 최씨가 수동개폐버튼을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경찰은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1080호 전동차 기관사 최씨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탈출구 봉쇄

이날 화재가 발생하자 중앙지하상가 지하 1층에 설치된 4개 방화벽이 작동되면서 일부 승객들은 방화벽때문에 탈출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이 곳 방화벽은 지난 2001년 설치됐으며 화재가 날 경우 지하내부의 연기 및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불이 나면 자동으로 문이 닫히도록 돼 있다.

방화벽은 벽 틈 사이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으나 미처 통과 가능 여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상당수는 50m가량 떨어진 지상통로까지 빠져나와야만 했다고 생존자들은 전했다.

◇소방.전기 시스템

대구지하철 방화 대참사에는 낡고 부족한 소방장비, 화재에 무방비로 노출된 전기설비, 형식적인 소방훈련 등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낡거나 부족한 소방장비

불이 난 전동차에는 소화기가 열차 1량 당 2개씩 뿐이었다. 소방법의 기준은 맞췄으나 순식간에 번지는 불에는 무용지물. 승강장에는 50m마다 소화전이 있고 역 구내에는 열.연기 감지기 등이 설치돼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소방시설 기술기준 규칙에 따라 전기설비가 있는 곳은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승강장에는 스프링클러마저 없었다. 이때문에 소방관들은 지하 3층 승강장으로 진입하려 해도 뜨거운 열기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고 했다.

연기를 제어하는 배연설비도 중앙로역에 13대 설치돼 있으나 총 용량은 시간당 70만㎥에 불과해 효능을 보이지 못했다. 목격자들은 발생 가스량이 워낙 많아 배연설비를 통해 환풍구 쪽으로 유독가스가 빠져 나가지 못하고 계단쪽으로 몰려 승객 피신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사고 발생 후 유독가스를 빼내기 위해 집연기를 동원했으나 지하까지 선이 닿지 않는 일도 발생했다. 이때문에 결국 화재 발생 5시간이나 지난 오후 2시40분에야 배연차를 끌고와 연기 제거 작업을 벌였다. 승객들은 이미 그 이전에 희생자가 돼 있었다. 지하 출구마다 설치돼 있는 가로 50cm, 세로 15cm 크기의 비상등 역시 가득 찬 유독가스에는 효력이 없었다.

소방관 각자가 의무적으로 착용토록 돼 있는 공기호흡기도 제 역할을 못했다. 이는 화재 때 30분밖에 견딜 수 없어 충전기 및 예비호흡기 준비가 필수지만 소방본부엔 그같은 장비가 태부족했던 것. 그 결과 한차례 현장을 다녀온 구조대원들은 곧바로 현장에 재투입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고 관계자가 전했다. 이런 문제는 50사단, 501여단, 3262공군부대, 미군 등으로부터 장비 및 인력을 협조받고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인명피해 키운 전기시설

전기시설이 화재로 소실될 경우와 관련한 대비도 전혀 돼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당시 지하 2층 대합실까지는 전기가 공급되고 있었지만 사고현장인 지하 3층의 승강장 쪽 배선 등은 타버려 전기 공급이 중단됐고, 그때문에 장시간 구조작업이 지연되는 차질이 빚어졌다. 오후 3시쯤 대합실 쪽에서 전기선을 끌어와 승강장에 전기를 공급하고서야 본격적인 구조작업에 나설 수 있었을 정도였다.

소방 전문가들은 이번 지하철 화재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전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대구 서부소방서 임동권 진압대장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선 소방관들도 극도의 두려움에 빠진다"며 "승객들이 승강장 주변의 옥내 소화전만 발견할 수 있었더라도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경우 전기시설을 소방점검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화재에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며, 미국.일본 등 안전 선진국 같이 전기시설을 소방의 범주에 넣어 통합 관리하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허술한 소방훈련

지하철의 화재 대비 훈련도 지금껏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소방법이 지하철역에서의 소방훈련을 매년 1회씩 실시토록 한데다 각 소방서의 훈련장소도 매년 1개 역을 돌아가며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

대구지하철공사가 월 1회 직원 대상 소방교육을 하고 있으나 소화기 사용법 등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 뿐 체계적인 화재 대비 훈련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관계자가 말했다. 지하철공사가 필요에 따라 실시하는 훈련도 승객 불편을 최소화한다는 차원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만 진행됐으며, 화재보다는 열차 탈선 등 때의 비상 복구 위주로 전개돼 온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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