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직도 따뜻한데... 시신 안고 통곡

최악의 재앙 상황을 겪으면서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현장은 고난을 거듭하는 구조 요원들과 목놓아 가족을 찾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사건 현장의 당사자들

○...방화 용의자와 같은 차를 교대역에서 탔던 전융남(63·대구 대명2동)씨는 반대편 자리에 플라스틱 우유통을 들고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라이터를 연신 켜 대 "지금 여기서 왜 라이터를 켜느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러나 불 붙은 우유통은 곧 바닥에 떨어졌고 일순 불길이 치솟았다는 것. 전씨는 "전동차 문이 열린 상태에서 불이 붙어 다행히 빠져 나온 승객이 많았다"고 했다.

○...불이 난 전동차의 맞은편에 멈춰섰던 전동차에 탔다는 정영섭(43·대구 산격동)씨는 중앙로역에 차가 정지해 문이 열리는 순간 시커먼 연기와 열기가 전동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아수라장이 됐다고 했다. 다시 문이 닫히면서 "당황하지 말라, 곧 조치를 취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이미 통제불능 상태였다는 것. 정씨는 "불이 났으면 역을 지나쳐 가 버리든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바로 대피하도록 했어야 옳지 않으냐"고 안타까워 했다.

○...역시 맞은편 열차에 탔던 류호정(30·대구 율하동)씨는 승객들이 어둠 속에서 출입구를 찾지 못해 넘어지고 부딪치는가 하면 일부는 이미 질식돼 전동차 바닥에 쓰러지는 등 금방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고 전했다. 자신들은 멀리서 희미한 소방관의 손전등 불빛을 발견, 그 곳을 향해 무작정 뛰어 사선을 넘을 수 있었다는 것.

◇안타까운 영안실

○...7구의 시신이 안치된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에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유족들의 오열이 이어졌다. 그 중 6명의 사망자 유족들은 이날 빈소조차 마련치 못해 유족 대기실에서 슬픔을 달래야 했다. 이무순(54·여·대구 계산동)씨는 "9남매 중 넷째 오빠를 잃었다"며 "집을 사 내달 1일 이사한다며 큰오빠와 함께 부모님 산소에 간다고 지하철을 탔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홍사진(63·여·대구 방촌동) 장정경(21·여·신암4동) 김인옥(29·여·검사동) 안선희(23·여·신서동) 허은영(37·여·김천시)씨 등 5구의 시신이 안치된 경북대병원 영안실에서도 조문실이 부족, 4명의 유가족들은 지하 1층 발인식장에서 오열해야 했다. 참사를 당한 허은영씨는 일주일 전 김천으로 이사한 뒤 이날 대구 서부정류장 인근 병원 진료를 위해 가다 변을 당했다고 가족들이 말했다. 아침 일찍 김천역을 출발해 대구역에서 내린 후 지하철을 탔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 달려온 친정어머니(60)는 딸의 영정을 껴안은 채 "딸을 살려달라"며 오열하다 실신했다.

○...동산병원에서 숨진 김형례(52·여·동구 검사동)씨는 들꽃마을, 청송교도소, SOS어린이 마을 등에 후원금을 보내거나 홀몸노인을 돕는 등 봉사를 아끼지 않아 온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더 안타깝게 했다. 김씨는 시내 출근길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대구 검단동 배성병원 영안실에서는 이날 자정쯤 "아직 희생자가 죽지 않았다"며 일부 유가족들이 생사 확인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희생자 구명희(26·대구 신암동)씨의 유가족들은 "아직도 사체가 따뜻한데 어떻게 죽었단 말이냐"며 영안실 관계자들에게 생사 재확인을 요구했다.

◇발 동동거리는 가족들

○...사고 현장 옆의 아카데미 시네마 옆에 설치된 병원 이송 상황판 앞은 이날 낮 100여명의 실종자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김동래(50·대구 상인동)씨는 "딸이 아침에 지하철 탄다고 나간 후 연락이 안돼 바로 달려 왔다"며 "상황판에도 이름이 없고 휴대전화도 연락이 안된다"고 안절부절 했다.

○...18일 저녁 무렵엔 실종자 가족들의 항의가 사고 현장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한 40대 여자는 상황실에 앉아 있던 조해녕 대구시장 앞의 책상을 두드리며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해달라고 했는데도 시장은 뭐하느냐"며 격렬히 항의했다. 혼절한 부인을 안고 있던 한 40대 남자는 "오전 11시부터 저녁까지 현장에서 기다렸는데도 관계 당국은 부상자 명단조차 내붙여 주지 않는다"며 "대학 1학년생 딸의 행방을 몰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충북 제천에서 왔다는 민웅기씨는 조카딸 심은(27)양이 실종됐다며 현장 상황실을 찾아 거세게 항의했다. 민씨는 사고 발생 7시간이 지났는데도 생사 확인이 안된다며 관계 당국의 무성의를 질타했다. 다른 유족 1명은 건너편 객차의 차량문이 열렸는지 여부조차 확인해 주지 않는다며 항의했고, 그 때문에 대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통곡했다.

○...18일 대구시민회관 소강당에 마련된 실종자 대기실에서는 배한솔(15)양의 어머니가 "동생들 공부를 돌봐주고 공부도 잘 하는 의젓한 맏딸이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구조 진척 상황

○...18일 오후 늦게까지도 사고현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구조대원 수백명이 투입됐지만 사건 발생 4시간이 지나도록 대다수가 밖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유독가스가 지하철 역사 내부를 완전히 메워 진입이 불가능했던 것.

○...사고 직후 소방 장비가 모자라 대구시 소방본부는 군부대에 첨단 소방장비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오후 1시38분쯤 불이 거의 진압되고도 연기 때문에 구조작업이 불가능하자 오후 2시40분쯤 배연차 1대가 도착해 약 30분만에 지하철 내 연기를 없앴다. 구조대원들은 오후 3시쯤 유독가스가 상당 부분 가신 뒤에야 지하철 승강장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나 이때마저 지하 3층 사고 현장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시야확보에 애를 먹었다.

오후 3시10분쯤에야 전동차 안에 시신이 널려있는 모습이 드러났고, 전동차에서 플랫폼까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쓰러진 주검들도 보였다. 불이 난 객차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 20여구가 뒤엉겨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전동차 안에 있던 시체는 오후 3시30분쯤에야 처음으로 10여구 수습돼 바깥으로 운구됐다. 지하철 2대의 전동차 12량 내부가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확인된 것도 이때였다. 구조대는 오후 3시를 넘기면서 야간 작업에 대비, 배선 설치 작업에 착수했다.

○...경북대 법의학팀 채종민 교수 외 2명은 유골 수습을 위해 3시45분쯤 현장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시체가 심하게 훼손돼 법의학팀의 지휘 아래 수습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연기 등으로 길이 막혔기 때문.

◇사건 현장의 모습들

○...구조대원들이 사고 현장에서 갖고 나온 유류품 중에는 가방이 가장 많았다. 18일 오후 유류품 정리작업을 하던 소방본부 현장 상황실 부근에서는 도시락이 든 가방 등 10여점 가까운 가방이 목격됐다. 한 소방대원은 "가방 주인이 꼭 살아 있어야 이 가방을 돌려줄 수 있을 텐데..." 라며 생존을 기원했다.

○...사고가 난 중앙로역에는 당시 이규용·박성주·박기찬·이정우·신영조씨 등 5명의 역무원이 근무 중이었고, 이씨 등 4명은 곽병원, 파견나온 신영조씨는 동산병원에 입원해 치료 받았다. 그 중 박성주·신영조씨는 부상이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8일 사고 현장에는 많은 미국·일본 등 외국 취재기자들이 대거 몰려 사건의 심각성을 방증했다. 특히 도쿄 지하철 테러사건의 악몽이 남아 있는 일본에서는 TBS, NHK, TV아사히, 후지TV, 요미우리신문 취재진 20여명이 몰려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 취재에 열중했다.

○...사건 현장을 취재하던 매일신문사 사진부 김태영·이채근 기자도 지하철 역사 진입 중 연기에 질식돼 곽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진기자들은 "생존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낮 12시30분쯤 대구역사 진입로를 통해 사고현장까지 진입, 불타고 있던 전동차를 취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엄청난 열기와 연기를 견디지 못했다.

◇외부의 시각

○...서울·부산 등 대구보다 먼저 지하철을 운행한 도시의 지하철 관계자들은 비록 방화에 의한 불가항력적 사고였다지만 인명피해가 이토록 불어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지하철공사 한 관계자는 "전기가 나가더라도 배터리에 의해 비상등이 반드시 자동 작동토록 돼 있는데 대구 사고 당시는 암흑이었다니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부산지하철공사 관계자도 "기관사가 출입문을 열 수 있도록 돼 있는데 문이 열리지 않은 점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배터리로 자동 작동되는 비상등 점화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뭔가 중요한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회1부

○...사고대책본부가 설치된 대구시민회관은 3월초까지 소강당에서의 각종 행사를 취소했다. 또 20일 대강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첼리스트 다니엘 리의 독주회도 지역 분위기를 감안, 행사가 취소됐다. 기획사 문화사랑 김종원 대표는 "참사 소식을 전해들은 다니엘 리가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기회가 닿으면 대구시민을 위한 위로 음악회를 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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