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바람이 아직 코끝을 시리게 하는 날씨인데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蓮塘)마을 한옥 흙마당은 봄볕을 이기지 못해 질펀했다.
일월산에서 대박산 줄기를 타고 뻗어내린 자양산 자락의 연당리는 과거 경상도 진보현에 속했던 때는 생부동(生部洞)이라 불렸다.
마을 어귀까지 마중나온 정휘권(52) 이장과 함께 동네를 한바퀴 돌았는데 불과 20여년 전까지는 100여 가구나 됐다는데 지금은 33 가구에 60명 주민이 고작이라며 정 이장은 한숨지었다.
동민 중 최연소자는 올해 영양고에 입학하는 정대호(17)군이고 그 다음이 새마을지도자인 장원복(51)씨, 그리고 세번째 젊은이가 바로 이장 자신이라며 웃었다.
정 이장은 "마을이 한창 번창했을 땐 담배와 고추농사도 엄청나게 많이 지었는데 요즘은 담배 농사는 딱 한집 뿐이고 고추농사와 축산도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지난 70년대까지만해도 면민체육대회가 있는 날엔 마을 청년들이 배구.육상 등 선수로 30~40명씩 차출되고도 후보 선수가 넘쳤는데 지금은 옛 얘기가 돼버렸다는 것.
새마을지도자 장씨는 "지금도 마을 상여를 모셔놓은 곳집에는 36명과 20명이 메는 행상 2벌이 보관돼 있는데 요즘은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60대는 물론이고 70대 노인들까지 모두 모여도 행상꾼 20명을 채우지 못해 빈자리가 생긴다"며 서글퍼했다.
이 마을은 조선 광해군 5년(1613) 성균관 진사를 지냈던 예천 태생의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1577~1650)선생이 은거해온 후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를 짓고 서석지(瑞石池.민속자료 제106호)를 만들어 연못 가운데는 부용화를 심고부터 연당으로 불렸다는 것. 그런데 연당의 연(蓮)은 부용화를 뜻한다는데 이는 한 임금을 섬기겠다는 석문선생의 올곧은 신념을 그대로 담고있다는 것이다.
연당리는 지금도 동래(東) 정씨가 90% 이상 분포된 집성촌으로 옛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정영방의 후손들 중 정긍모(鄭肯模萊.1879~1944)는 부친 정익소(鄭翼韶)의 제문을 모아 '만제록(輓祭錄)'을 편술했고 앞서 증손인 정도건(鄭道鍵.1688~1740)은 '대역호악음질욕잠(大易好樂吟窒慾箴)'을 저작했고, 손자인 눌재(訥齋) 정요천(鄭堯天.1639~1700)은 1660년 현종 1년에 진사, 현종 4년에는 병과에 급제해 전적(典籍.성균관 정6품벼슬)을 지냈고 중학(中學)(당시 서울의 4대 교육기관 중 한 곳)의 교수까지 거쳤는데 효성도 지극했다는 것. 만석꾼인 정수호댁의 경우는 과거 '신사들'은 물론, 마을에서 10여리 이내 농토는 모두 자신의 토지로 추수가 끝나면 벼 가마니가 집채보다 높게 쌓였다고 했다.
연당리의 주변 형세를 보면 사방이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앞에는 봉화에서 시작된 청기천과 영양천이 합쳐진 반변천이 휘감아 흐르는데 흡사 안동 하회마을의 축소판 같다.
마을 뒤편의 자영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이 있는데 자태가 매우 빼어나고 산과 마을 사이에 있는 축구장만한 공터 잡풀속에서는 대낮인데도 산토끼가 이리저리 뛰고있었다.
19세때 안동 지례 마을에서 가마타고 이곳으로 시집왔다는 김필환(81) 할머니는 "옛날에는 새벽잠을 설치면서 냇가에 있는 우물에서 물긷는 일을 30여년쯤 했는데 정말 지금 생각해도 너무 힘들었다"며 옛시절을 회상했다.
김 할머니는 또 "당시 만석꾼.천석꾼으로 불렸던 부잣집들은 물만 길어 나르는 사람을 2, 3명씩 별도로 두었는데 형편이 어려운 집들은 집안에 큰 일이 있는 때엔 밤새도록 물을 긷느라 다리와 목이 떨어지는줄 알았다"며 웃었다.
지금 이 마을에선 40, 50대 주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할머니들은 매일 점심 후 7, 8명씩 모여 심심풀이 화투도 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지난날에 관한 대화는 전혀 않는다고 했다.
과거 일들은 모두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뿐이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마을 여자들은 농사일은 전혀 않았고 모두들 길쌈과 옷짓기.방아찧기.빨래.다듬이질.밥짓기 등 가사일만을 했는데 너무도 일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길쌈한 무거운 옷감들을 머리에 이고 입암은 물론, 일월.청기.영양.진보 등 장날마다 돌아다니며 팔았는데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당시 아낙들은 모두가 일더미에 묻혀 고생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용케도 참고 견뎌낸 것 같았다고. 할머니들은 지금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은 새벽녘 담너머로 넘나들던 제사 음식이었는데 잠자다 일어나 먹던 음식이 왜 그렇게도 맛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정많고 살가웠던 이웃들도 대부분 외지로 떠나버려 이젠 제대로 놀러 갈 곳도 없다면서 쓸쓸해 했다.
이장 부인인 원수자(46)씨는 "우리마을 한복판에는 고래등 같은 고한옥들이 즐비한데 지금은 주인없이 텅빈 집들이 많아 마을에 온기조차 사라진듯한 느낌이다"고 했다.
다행히 마을의 고가들은 유교문화권 사업으로 곧 보수 및 단장된다는 소식에 동민들은 그나마 위안을 받고있다고 했다.
마을앞 길 건너편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1979년 1월 지정)인 연당동 석불좌상(총높이 2.23m 불상높이 1.12m) 이 보호각 속에 모셔져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불은 화강석으로 왼손에는 둥근 약항아리를 들고 있는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인데 목부분과 얼굴 오른쪽 어깨부분이 절단 또는 파손돼 시멘트로 땜질돼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런데 석불에서 불과 10여m 거리에 있는 반변천 바닥에는 몸통 폭 20m 높이 5m쯤 되는 거북이가 막 물가로 나아가려는 듯한 형상을 한 검은 바위가 자리잡고 있어 매우 강렬한 힘을 느끼게 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사부령(思夫嶺전투: 일명 도리깨전투)에 대해서만은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
1896년 5월12일 당시 왜군은 벽산 김도연 선생을 잡기위해 혈안이었는데 거짓 정보를 흘려 마을앞 사부령 고개에 총칼을 들고 나타난 왜군들을 도리깨와 괭이를 들고 당당히 맞서 싸우다 12명의 애국지사가 순직했다.
지난 1990년 10월 연당리 사부령에는 순국지사합동기념비가 세워져 이들의 넋을 기리고 있는데 영양군은 올해 2천400만원을 들여 조경공사와 주변환경정비사업으로 시설물을 말끔히 정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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