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005년이면 100주년을 맞게 되는 멕시코 이민은 지난 96년 합동영화사가 현지에서 제작한 장미희 주연의 149분짜리 영화 '애니깽(Anniquin)'을 통해 한인 여성들의 서글픈 이민생활 애환만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와이의 첫 이민보다 2년 늦은 1905년 4월 4일 제물포(인천). 전국 18개 지역에서 모여든 남자 702명과 여자 135명, 어린이 196명 등 1천33명(275가구, 독신 196명)이 영국 상선 일포드호에 승선해 하와이보다 먼 미지의 나라 멕시코로 떠났다.
서울 인천 출신이 많았으나 영남사람도 부산 73명, 마산 33명, 대구 18명, 경주 7명, 울산 6명, 밀양 3명 등 140여명이나 됐다.
이들은 상투머리에 갓을 쓰거나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
신세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있던 대다수는 가난 때문에 조국을 등진 농민과 도시빈민이었다.
하와이로 가는 줄 알았던 사람도 있었다.
일제의 폭압을 피하려는 옛 광무군 퇴역군인 200여명과 하급관리, 몰락한 양반, 부산 출신의 어부, 내시, 무당, 신부 등도 섞여 있어 흥미롭다.
'서유견문'을 지은 개화정치가 유길준의 삼촌인 유진태 부부도 이민선을 탔다.
재미 극작가 겸 한·멕 역사연구소장 이자경(59·여·LA)씨는 "이민회사인 일본의 대륙식민합자회사가 납치한 8~15세의 부랑아와 걸인들도 300여명 포함돼 있었고 서류를 조작해 성인으로 나이를 속인 경우도 많았다"며 "영국인과 일본인 이민브로커의 농간에 의해 이뤄진 멕시코 이민은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게 만든 불법 농노이민"이라고 주장한다.
이씨는 "한인들은 식민회사가 6개월간 7차례나 황성신문에 낸 모집광고를 통해 '떼돈을 번다'며 떠벌인 과장선전에 속아 멕시코 도착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근로환경은 어떤지 전혀 몰랐다"며 "애니깽 농장주들이 1명당 200달러의 배삯 등 여비를 내주는 대가로 4년간 의무노동을 하는 조건으로 성사된 부채이민이어서 대한제국이 허가한 하와이 이민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단 1회로 끝나버린 멕시코 이민은 선박용 로프의 원료식물인 애니깽을 재배하며 세계시장을 독점한 유카탄 농장주협회의 대리인인 영국 상인 마이어스에 의해 추진됐다.
마이어스는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유카탄에 불어닥친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1904년 중국과 일본에서 이민을 모집하려다 이미 중국인들이 멕시코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실패했다.
이에 따라 그는 식민회사와 공모해 이민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멕시코 사정에 어두운 한국의 약점을 이용, 한인 이민을 모집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은 확인절차도 없이 여권을 발행, 불법이민을 도와준 결과를 낳았다.
황성신문 1904년 12월 17일자 광고는 멕시코를 '물과 기후가 좋고 질병이 없는 지상낙원이며, 땅이 기름지고 미국처럼 부유해 큰 돈을 벌 수 있는 문명대국'으로 묘사했다.
4년 후 귀향 가능, 고임금 및 7세 어린이의 초등학교 입학 보장, 재계약 시 상여금 지급 등 달콤한 문구로 가득해 생활고에 찌든 한인들을 현혹시켰다.
일본 외무성 자료는 '마이어스는 1905년 3월 14일 부산에서 이민 400여명을 일포드호에 태우고 제물포로 가서 나머지 집결 이민자들을 승선시켜 2주일 후 출항했다'고 전한다.
당초 이민자들은 부산에 집결해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여권문제로 차질을 빚다가 3월 6일 제물포에서 대한제국의 여권을 받는 즉시 출발했다는 설도 있다.
한인들은 비좁은 배에서 심한 멀미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다 3명이 죽어 수장된 고통스런 항해 끝에 5월 15일께 태평양 연안 멕시코 최남단 항구도시인 살리나크루스에 도착했다.
이어 열차로 길이 220㎞의 테우안테펙 지협을 지나 멕시코만 남부의 관문인 코앗사 코알코스에서 화물선으로 갈아타고 멕시코만을 거슬러 올라가 20일께 유카탄반도 북단의 프로그레소항에 닿았다.
당시 한인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하선했을 선착장은 현재 풍파에 닳고 파손돼 나무말뚝과 콘크리트 골조 밑부분만 남아 새들의 휴식처로 바뀌고, 하얀 밀가루같은 모래로 가득한 백사장이 하염없이 펼쳐진 주변 휴양지에 묻혀버려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게 한다.
멕시코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서동수(66) 회장은 "한인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남쪽 내륙으로 35㎞ 떨어진 메리다로 이동, 인근 22~25개 이상의 애니깽 농장에 분산수용된 뒤 상상도 못한 노예생활 속에 험난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나중에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다 남의 땅에 서럽게 뼈를 묻고 말았고, 20가구 70명만 귀국선을 탔다.
일부는 또 다른 기회의 땅을 찾아 쿠바와 다른 중남미 지역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국과 교류가 빈번한 미국과 아시아의 한인들은 역사적 관심과 조명을 받고 있지만 멕시코의 코레아노들은 조국과 민족의 무관심으로 '잊혀진 종족'처럼 방치돼 있다"고 씁쓸해 했다.
멕시코 프로그레소=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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