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풀어지면서 한 잔

만촌동 산비알, 포장집

구석에 몰리며 두 잔

낮술에 마음 맡겨 희멀건 낮달처럼

희멀겋게 희멀겋게 석 잔, 넉 잔

거울을 깨뜨려요.

구석으로 움츠리며 낮술에 젖어

얼굴 버리고 걸어가요. 요즈음은

아예 얼굴 지우고, 깨어서도

잠자며 걸어가요.

걸어가요. 한반도의 그늘 속을

낮술에 끌리어 낮달처럼

희멀겋게 희멀겋게 다섯 잔

여섯 잔, 열두 잔

- 이태수 '낮술' 일부

타락하고 암울한 실존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중력의 공간 속에 잠입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낮술이다.

여기서 낮술은 시의 행간일 수도 있고 예술행위의 몰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얼굴 지우고 가려 해도 허무의 희멀건 낮달까지 지울 수 없다.

시인이란 이런 긴장의 양극화 상태에서 순수의 비무장지대, 즉 낮술에 젖어 오늘도 한반도의 그늘 속을 헤맬 수밖에 없다.

권기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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