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상덕의 대중문화 엿보기-재난영화

"어머니, 아이들 잘 보살펴주세요. 저 죽을 것 같아요". 불에 타 죽으면서도 청상과부 새댁은 어린 자식들의 앞날이 걱정이다.

조리기술만 다 익히면 삼남매를 잘 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독가스에 숨을 쉬지 못하고, 암흑은 죽음과 함께 무겁게 내려왔지만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다.

그랬다.

어제도 오늘도 참사현장을 둘러보았지만 천재지변은 분명 아니다.

특정인에 의해 저질러진 사고인데도 분노조차 풀 길 없다.

50대의 방화범, 40을 바라보는 기관사…. 불과 몇 사람으로 도시 전체가 비통에 잠길 만큼 허약한 도시에 내가 살고 있다니….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초점을 맞춘 재앙영화. 1970년대 '포세이돈 어드벤처''대지진''타워링'이 기대이상의 흥행성적을 거두면서 독립된 장르로 발전했다.

인기의 비결은 간단하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 조건 속에 놓여 있는가. 이 공포의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감동적 메시지가 끊임없이 관객을 불러왔다.

하지만 곧 소강상태를 맞는다.

기술력의 한계와 소재의 빈곤이 문제였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막을 수 있는 재난이어서 영화적 상상력을 무한정으로 제공할 수 없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CG를 비롯한 갖가지 SFX의 발전이 사실감을 높이면서 재앙영화의 르네상스를 맞게된다.

지나친 과학발달로 인해 빚어지는 생태파괴에 대한 경고와 함께, 인간의 탐욕을 징계하는 도덕적 교훈이 관객을 움직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제 재앙영화는 다시 달라졌다.

유전자조작에 따른 생태질서의 파괴, 정체불명의 공격에 의한 현대문명의 파괴 등 다양한 소재가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시켜주고 있다.

영화는 현실을 앞서가지 못하는 것. 미국의 9·11테러참사가 증명하듯 영화가 아무리 지독한 환타지를 동원해도 현실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대구지하철참사는 영화보다 한참이나 처지는 현실이다.

내용이나 시대 모두가 너무나 후진적이다.

대명천지 21세기에 30년 전에도 있을 수 없었던 참사가 일어나다니….

대경대 방송연예제작학과 교수 sdhant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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