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 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요,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바지의 독재에 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버렸어야 했다.

-장석주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일부

속물은 감히 자기의 개성을 믿지 못한다.

속물은 유행의 노예인 것이다.

그것이 옷이든 이데올로기이든 남이 던져준 가치를 아무 회의없이 앵무새처럼 자기 것인 양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자 시인은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자기에 맞지 않는 기성미학, 기성도덕, 기성질서의 헐렁한 바지에 대해 끝까지 벗어나려 반항한다.

그것이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세계인 것이다.

권기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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