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2003-가정폭력 상담실

대구시여성회관 태평상담실내 여성폭력 긴급전화 1366센터. 1평 남짓한 부스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전문상담원들이 24시간 3교대 대기 근무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곳이다.

상담원들은 전화벨이 울리면 본능적으로 상담기록부를 펼쳐든다.

이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피해자로 추정되는 여성의 상태. 침착한지 또는 흥분, 분통, 침울, 성냄 등의 어떤 상태인지 먼저 파악한다.

그다음 긴급을 요하는 상담내용의 핵심을 물어보고 조치사항을 결정한다.

이렇게 받는 전화가 하루 평균 50여통. 많을 때는 70, 80여통에 달한다.

1366을 확인해 두고자 하는 여성의 단순 전화부터 본격 상담을 필요로 하는 전화까지 통화시간도 짧게는 1, 2분에서 10분, 20분을 넘어가기도 한다.

태평상담실의 경우 지난해 상담건수는 8천800여건. 이중 가정폭력 상담이 2천400여건으로 가장 많다.

그밖에 이혼 등 가정법률문제, 생활상담, 성폭력 등의 순이다.

여성부 집계를 보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전국 가정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가정폭력 상담건수는 99년 4만1천479건에서 2000년 7만5천732건, 2001년 11만4천612건 등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통계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정폭력의 특징이 피해자가 구타당한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를 꺼려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태평상담실에는 긴급피난처와 모자일시보호실(쉼터)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쉼터에는 지난달 31명이 입소해 있었으나 3월 신학기가 되면서 자녀들 때문에 상당수가 빠져나가 3일 현재는 15명선.

이귀임 담당은 "쉼터는 폭력에서 격리가 필요한 여성들이 편안한 환경에서 상담을 받고 신체적·정신적 재활을 준비하는 곳"이라며 "피해여성들의 피멍이 든 자국을 확인할때면 때로 자신도 몸서리가 날 정도"라고 말했다.

결혼 15년을 넘긴 40대 최모씨는 5년째 남편의 상습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입소한 사례. 아이들때문에 구타를 견뎌온 최씨는 최근까지 상담이나 신고는커녕 병원에 가본적도 없었다.

치료를 받다가 남에게 알려질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보다못한 동생의 손에 이끌려 상담소를 찾게 됐다.

이혼을 고려해도 남편이 아이를 '볼모'로 놓아주지 않아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50대 중반인 김모씨는 아직 '별거'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다.

폭행만 없으면 어떻게 되든지 가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다.

이젠 성장한 자녀들이 말려도 김씨는 자녀 결혼식 등에 아버지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특히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춘 여성은 혼자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경향이 더 강해 피해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상담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귀임 담당은 "아내에 대한 폭력은 어느 여성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면서 "전문직이나 중상류층 여성은 실태 파악 때 접근이 어렵고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해 폭력이 더 은폐되는 경향이 있어 상담소를 어쩌다 한번 방문한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구여성의 전화 부설 가정폭력상담소가 운영하는 쉼터에도 4일 현재 8명이 입소해 있다.

고명숙 사무국장은 "이들은 대부분 어느 한순간도 편하게 쉬어본 적이 없는 여성들이며 가정복귀와 이혼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몇번 자리를 옮긴 쉼터는 상담소내 상근자도 일부 담당자를 제외하곤 그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가해 남편들이 주변에서 서성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다.

주변 동네 주민들도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성의 전화 연합 25개 지부중에서 6곳이 운영되고 있는 쉼터는 피해 여성이 원하면 본인이 원하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남편의 감시를 피해 타지역에서 대구로 오는 경우도 있다.

상담원이 상주하고 있지만 쉼터내 생활은 입소한 여성들끼리 식사당번을 정하고 순서를 지킨다.

직장에 나가거나 여성인력개발센터 등의 직업프로그램을 이수하는 등 외출에는 제한이 없다.

다만 정해진 시간을 지켜주면 된다.

여성의 전화 관계자는 "이곳 쉼터에서 2개월 가량을 지내는 동안 상담프로그램과 각종 지원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성들의 무너졌던 자긍심을 살려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이혼을 고려하는 여성에게는 후회가 되더라도 자신감있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구가정법률상담소 김미애 상담위원은 가정폭력피해자의 실태와 의식에 관한 연구논문에서 가정폭력은 여성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뿐 아니라 특히 피해 여성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이게 한다고 밝혔다.

이는 우울한 기분과 공허감, 흥미상실과 낮은 자존감, 죄책감, 자살기도 등의 상태를 보이게 하고 무력감과 고립감마저 겪게 된다며 가정폭력 피해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