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모든 작물의 파종기(播種期). 그래서 옛말에 '봄비가 잦으면 시어머니 손이 커진다'고 했던가. 기름처럼 귀하다는 봄비가 유난히 잦은 올 봄이다.
풍년을 예약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소설가 이문열의 장편 소설 '선택'의 주인공으로 실존 인물인 정부인 안동 장씨가 한동안 기거했던 충효당을 찾아가는 날도 봄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우산을 들지 않아도 될 만큼의 가는 보슬비. 아마도 땅 속의 씨앗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고 봄비는 그렇게 내리나 보다.
충효당 아래 매화꽃도 도톰하니 꽃망울을 키우고 있었다.
절기를 잊지 않는 자연의 질서가 경이로울 뿐이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전통마을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마을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포근하고 아담한 모습이다.
마을 뒤로는 태백준령을 따라 내려온 야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바로 앞에는 송천이 흐른다.
들판 또한 시원하다.
배산임수에다 넓은 농지. 굳이 풍수지리를 들추지 않는다 하더라도 좋은 터라는 것 쯤은 아마추어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인량리는 영덕군 영해에서 창수 방향으로 접어들어 차량으로 5분 남짓 가면 나온다.
길가에 큼지막하게 인량리라는 이정표가 서있어 찾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이 마을은 '나라골','나래골'로 불리기도 한다.
상고시대 '우시국'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어 나라골이라 불렀다는 것과, 양쪽 날개를 펼쳐 놓은 것 같은 산세 속에 마을이 달린 듯 해 나래골이 됐다는 얘기에서 유래한다.
인량리(仁良里)라는 동명은 어질고 인자한 현인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 하여 조선 광해군때부터 불려지고 있다한다.
이 마을에는 1400년대부터 1700년대 사이에 건축된 □자형, ―자형 전통가옥이 30여채나 있고, 이 지방에서는 독특하게 ㄷ 자형 기옥도 있다.
짧게는 100년, 길게는 500년이 넘었다.
양반골답게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황제의 친필현판을 걸어 놓은 재령 이씨 집안의 충효당과 사당인 사암재, 야성 정씨의 고택으로 평산 신씨 집안이 사들인 만괴루, 효자로 소문난 이시형의 우계종택, 병조참의를 지낸 김익중의 용암종택…재령 이씨, 안동 권씨, 무안 박씨, 대흥 백씨 등 종갓집들이 즐비하다.
이중 갈암종택은 갈암의 10대손이 1910년 청송 진보 광덕리에 지었다가 임하댐 건설로 지난 92년 인량리로 이건했다.
집집마다 법도가 엄격해 일제때 일본인들도 마을사람들의 눈치를 보았을 정도로 기개가 대단했던 양반골로, 퇴계 이황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영남 유학을 중흥시킨 갈암 이현일과 현 삼보컴퓨터 이용태 명예회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잦은 봄비로 물이 가득 차오른 개울가를 지나 마을에 이르니 영덕군청에서 실시하는 유교문화사업에 따라 고택의 증.개축이 한창이다.
우계종택에서 만난 이혁희(62)씨는 "진작 이런 사업을 펼쳤더라면 비바람과 먹기와에 내려앉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헐린 50여 채의 고택을 살릴 수 있었을텐데…" 라며 아쉬워하면서도 군청에서 고쳐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선조 당시, 울진 평해에서부터 포항 흥해에 걸쳐 관할하며 최고 명문가를 자랑했던 이 마을도 세월의 풍설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현재 주민은 150여 가구 400여명. 대부분 노인네들이라서 골목길에서 사람 만나기도 쉽잖다.
세월의 허허로움을 생각하며 발길을 옮겨 다다른 인량초등학교. 몇년전 문을 닫아 황량하기 그지없다.
교정에 빛바랜 잡초들이 무성했고, 담장도 허물어져 있다.
사람들을 빼간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 지난 날 인재의 산실로 이름을 날렸던 이곳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갈암종택의 대문 열쇠를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이길호(63)씨의 안내를 받아 마을을 돌아보니 대궐같은 기와집과 철근 슬래브 및 슬레이트집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혼란스러움이 겹쳐 안타깝다.
일부 문중의 후손들이 사비를 들여 종택들을 보수, 그마나 위안이 된다.
이 마을엔 8개의 문화재가 있다.
그중 국가지정문화재는 충효당 하나.
소설 '선택'의 정부인 안동 장씨가 19세때 시집온 집이기도 하고, 인량마을을 학문의 요람으로 드높인 갈암과 삼보컴퓨터 이 명예회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5세기 중엽 조선 성종 연간에 건축됐다.
건물 구성은 안채.사랑채.사당 등 3동으로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잡았고 마을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산 밑에 위치하고 있다.
담장 길이만도 100m가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경사진 언덕에 앞으로만 석축을 쌓아 지대를 만드는 등 건물배치에 주위 환경과의 조화를 꾀한 모습이 역력하다.
건물 바로 옆에 500년된 은행나무가 소리없이 충효당을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흔히들 영덕을 '소안동'으로 불렀다.
소안동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다.
하나는 소(笑)안동으로, 영덕지역의 학문이 워낙 높아 안동의 학문을 웃을 정도였다는 것. 다른 하나는 소(小)안동이다.
말 그대로 안동은 큰집, 영덕은 작은 집이라는 의미다.
어찌됐든 조선조 영덕지역의 학문이 수준 이상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조 영덕의 학문 요람은 창수 인량리와 영해 괴시리 두곳이다.
안동과 영덕 인량리는 학문을 서로 견줄 만큼 인재가 배출되다 보니 양반골답게 양 지역간 혼인 또한 자연스런 일이 돼 지금도 인량리의 80세를 훌쩍 넘은 노인들 중엔 안동 출신 규수들이 많다.
출입깨나 하는 집안 경우 외가 또는 고모는 거의 다 안동 지역이다.
양반골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현존하는 한글조리서 중 가장 오래된 '음식디미방'을 남겼고, 갈암선생 등 일곱 아들과 네 딸을 훌륭하게 길러낸 정부인 안동 장씨. 그가 옛날 그시절 이 마을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문화관광부가 지난 1999년 11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한 그는 여성의 몸으로 군자같은 인생을 살아 신사임당.허난설헌에 곧잘 필적되며 비교되기도 한다.
충효당 처마 끝에 서니 인근 영해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상큼하다.
어디선가 정부인이 자녀들과 함께 글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는 듯도 하고.
최윤채기자 cy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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